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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을 받은 사람이 긍휼을 베푸는 것은 당연하다. 마태복음 18장 후반부에 보면, 무려 만 달란트나 빚진 종이 주인으로부터 긍휼을 입어 그 빚을 탕감 받게 되는 사건이 소개된다. 그런데 그 종은 자신으로부터 고작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에게, 그 동료가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돈을 갚으라며 감옥에 쳐넣는다. 다른 동료가 이 사실을 알아 주인에게 알리게 되는데, 결국 그 종은 다시 주인에게 불려가 탕감 받은 것을 취소 당하고 옥졸들에게 넘겨진다. 배은망덕의 전형인 셈이다. 완전 쌤통이다.
한편, 마태복음 5장 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18장과는 달리 여기선 긍휼을 베푸는 행위가 먼저다. 긍휼히 여김 받는 것은 그 응답으로 주어진다. 주면 받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받은 사람이 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가 18장이라면, 5장은 주면 받게 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적인 삶에서 신경 써야만 하는 부분은 전자라고 난 생각한다. 받은 사람이 주어야만 한다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우리 구원받은 하나님나라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린 먼저 줄 수 있는 자격을 이미 박탈당했다. 비가역적으로 무조건적인 긍휼을 이미 받아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베푸는 것밖에 없다.
긍휼을 베푼다는 것은 행동을 동반한다. 행동은 곧 함께 함이다. 그리고 함께 함은 공감하는 것이다. 긍휼을 받을 사람의 삶에 개입하여 그 사람을 공감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를 보고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마는 것이나 돈 몇 푼 던져주고 마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을 공감하는 것이다. 이는 여호와의 공의를 행하는 삶과도 통한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가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기 위함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한다. 그 영적 아브라함의 후손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눌린 자들을 공감하는 것도 긍휼함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 긍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우리가 받은 것이다. 우리는 그저 흘러가게 할 뿐이다. 긍휼의 통로다.
팔복에서 긍휼을 주면 받게 된다는 말 역시 여호와의 공의를 공감이라는 말로써 이해해도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공감은 일방적이지 않다. 역시 주고 받는 것이다. 함께 하는 것이다. 내가 먼저 다가가 긍휼을 베풀면 (공감하기를 시도하면), 상대방으로부터 아니면 제 3자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된다는 (공감 받게 된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첫 사랑이 우리의 공통된 시작임을 기억하자. 우리는 긍휼을 베푸는 자다. 공감을 먼저 시도하는 자다. 함께 하는 자다. 하나님나라 백성, 그리스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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