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in faith

긍휼을 베푸는 자, 공감하는 자.

가난한선비/과학자 2017. 8. 7. 12:06

긍휼을 받은 사람이 긍휼을 베푸는 것은 당연하다. 마태복음 18장 후반부에 보면, 무려 만 달란트나 빚진 종이 주인으로부터 긍휼을 입어 그 빚을 탕감 받게 되는 사건이 소개된다. 그런데 그 종은 자신으로부터 고작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에게, 그 동료가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돈을 갚으라며 감옥에 쳐넣는다. 다른 동료가 이 사실을 알아 주인에게 알리게 되는데, 결국 그 종은 다시 주인에게 불려가 탕감 받은 것을 취소 당하고 옥졸들에게 넘겨진다. 배은망덕의 전형인 셈이다. 완전 쌤통이다.

 

한편, 마태복음 5 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18장과는 달리 여기선 긍휼을 베푸는 행위가 먼저다. 긍휼히 여김 받는 것은 그 응답으로 주어진다. 주면 받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받은 사람이 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가 18장이라면, 5장은 주면 받게 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적인 삶에서 신경 써야만 하는 부분은 전자라고 난 생각한다. 받은 사람이 주어야만 한다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우리 구원받은 하나님나라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린 먼저 줄 수 있는 자격을 이미 박탈당했다. 비가역적으로 무조건적인 긍휼을 이미 받아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베푸는 것밖에 없다.

 

긍휼을 베푼다는 것은 행동을 동반한다. 행동은 곧 함께 함이다. 그리고 함께 함은 공감하는 것이다. 긍휼을 받을 사람의 삶에 개입하여 그 사람을 공감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를 보고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마는 것이나 돈 몇 푼 던져주고 마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을 공감하는 것이다. 이는 여호와의 공의를 행하는 삶과도 통한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가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기 위함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한다. 그 영적 아브라함의 후손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눌린 자들을 공감하는 것도 긍휼함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 긍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우리가 받은 것이다. 우리는 그저 흘러가게 할 뿐이다. 긍휼의 통로다.

 

팔복에서 긍휼을 주면 받게 된다는 말 역시 여호와의 공의를 공감이라는 말로써 이해해도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공감은 일방적이지 않다. 역시 주고 받는 것이다. 함께 하는 것이다. 내가 먼저 다가가 긍휼을 베풀면 (공감하기를 시도하면), 상대방으로부터 아니면 제 3자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된다는 (공감 받게 된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첫 사랑이 우리의 공통된 시작임을 기억하자. 우리는 긍휼을 베푸는 자다. 공감을 먼저 시도하는 자다. 함께 하는 자다. 하나님나라 백성, 그리스도인이다.

'in fai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뜻  (0) 2017.08.24
죄의 흔적  (0) 2017.08.09
나 (2).  (0) 2017.08.04
나.  (0) 2017.08.04
거짓말하지 마라.  (0) 2017.08.04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