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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faith

고독

가난한선비/과학자 2017. 11. 25. 07:56

고독은 잠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나를 떠나는 여행. 단, 이 여행은 길지 않아야 하고, 또한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독의 의미는 곧 방황이 되기 때문이다. 잠시 나를 떠나 다시 날 찾는 것, 여기에 고독의 참된 의미가 있다.


고독은 우릴 낯선 곳으로 인도하기도 하지만, 때론 익숙함으로도 우릴 이끈다. 언젠가 머리를 통하지 않고도 벌컥 알게 되었던 그 느낌, 그 냄새, 그 감촉. 과거의 나와의 데자뷰. 심리학자들은 이 현상을 과거의 상처나 그에 대한 치유, 아니면 욕구의 불만족 등으로 설명을 하겠지만, 이것 역시 생물학자인 난 자가항상성의 일환으로 본다. 구체적인 원인은 모르지만, 내 몸이, 내 마음이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것이 치유를 목적으로 하든, 그저 추억에 잠겨보는 것이든, 괜히 혼자 있고 싶은 것이든 상관없다.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알지 않고도 우린 고독으로부터의 유익을 충분히 누릴 수 있다.


아이를 재우고 아내도 잠든 밤 늦은 시간, 보통 난 적어도 한 시간이라도 책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글도 쓰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나름 고독으로 떠나는 시간이다. 난 이 시간이 참 좋다.


읽어나가는 책에 따라 묵상이나 기도, 그리고 글의 방향과 흐름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또 항상 그런 것도 아니다. 종종 뜬금없는 생각이 날 찾아온다. 물론 이렇게 저렇게 그 생각이 떠오른 이유를 추론하여 가장 해답스러운 답을 밝혀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은 과감히 떨쳐버린다. 그냥 받아들인다. 그 날은 그 생각이 내게 필요했던 것이다.


오늘은 뚱딴지같이 내가 과거에 경험했던 아주 익숙한 불안함이 날 찾아왔다. 그 생각과 조우한 나는 말한다. "또? 클리블랜드?" 그렇다. 클리블랜드에 있었을 때, 24시간 날 감싸고 있었던, 눈에 보이지 않고 숨으로 들이쉬지 않아도 늘 내 안과 밖에 존재했던 그 불안함. 그것이 순식간에 날 감쌌다. 그렇다고 불안해진 건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도 빠른 속도로 그 때 그 장소에서와 똑같은 기분에 휩싸일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어려움이 빠져 그 한 가운데에 있을 때, 마지막으로 잡고 있던 풀 뿌리까지도 뽑혔을 때, 우린 절망이란 녀석과 하나가 된다. 어쨌거나 그 시절도 지나가는 법이며, 다 지난 후에는 그 때를 회고하며 남의 얘기하듯 웃으면서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모든 시간은 정지된 것처럼 느껴지며 죽음이란 녀석의 냄새까지도 맡게 된다. 그럴 땐 그 어떤 사람의 말도 들리지 않는 법이다. 아무리 지혜로운 말이라도, 아무리 가슴을 울리는 말이라도, 다 소용이 없다. 그야말로 위기인 것이다.


난 이 순간을 인간의 한계를 만나는 시간이라 부른다. 내가 만난, 대화가 통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그 시점을 모두 지나왔다는 것이다. 다들 그 시기를 각자만의 방법으로 견뎌내며 단련되어졌다. 그 진정한 한계에 봉착한 순간은, 곧 인간인 우리들 안에는 그 한계를 넘어설만한 아무런 희망이 없음을 발견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즉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기 살을 파먹으며 파멸에 이를 뿐이다. 용기 내서 도움을 요청하고 받아들이는 것, 비로소 겸손함을 보일 순간이다. 비로소 긴 고독의 여행을 마치고 새로운 나를 발견할 시간이다.


권연경 교수님의 '로마서 산책'을 읽고 요약하기 위해 로마서를 함께 읽어나가고 있다. 구원의 방법을 논하기 이전에 나의 존재가 제대로 발견되어지길 소원한다. 강제로 주어졌든 스스로 선택했든, 고독의 여행에서 만난 나의 본 모습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면, 바울이 그렇게도 열을 내며 토했던 칭의의 의미를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주 나에겐 적절한 시간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이런 사소한 일상에서의 책 선정의 흐름 속에서도 인도하시고 내게 말씀해 주신다. 나에게 필요한 시간이라 감사하며 받아들인다. 로마서를 읽고 먹기에 순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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