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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적인 것.
차라리 번쩍번쩍하지 않다면, 차라리 최신식 건물과 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차라리 사람들이 보고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만큼 초라한 외형을 가진 교회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 안에서 이뤄지는 예배 의식들을 잘 치러내는 것만이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는 것처럼 당당히 여겨지고 또 암묵적으로 강요되어지기까지 하는 교회 안에는 화려함과 웅장함은 있을지언정 사랑은 느껴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높은 곳에 계셔 가장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자를 선별하여 복을 더 많이 주시는 하나님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그들이 뽐내는 거룩함?의 배후엔 당연히 조용한 경쟁논리가 자리잡을 수밖에 없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많은 돈을 헌금한 교인들이나, 새벽기도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결석하지 않고 목숨 걸고 출석하는 교인들, 아니면 세상에서 성공하여 소위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인들이 상석을 차지하게 되는 게 아주 당연한 논리일 것이다. 어쩌면 이런 교회는 세상의 물질주의와 성공주의가 거룩함?이라는 옷을 입었을 뿐이지 그대로, 아니 한 술 더 떠서 판을 치고 있는 현장일지도 모른다.
또한 하늘의 상급이라는 타이틀을 더 많이 받기 위해 그들은 가능한 발을 땅에서 띄우려고 안간힘을 쓴다. 참 다행이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서 물리학적 법칙인 중력의 지배하에 있어서 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누가 누가 더 공중부양을 높이 하느냐를 가지고 교회에서 암묵적인 경쟁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 웃기지 않은가. 차라리 삼장법사를 소환하여 그 뒤를 따르라.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교인들도 그 거룩?한 예배시간 만큼은 자신의 행위가 카운트되어 자신의 행위 만큼 응답 받을 거라는 보상심리를 가진다. 세상에서 자신이 느끼기에도 죄책감을 가질 만큼 맘대로 살다가도 교회에서 그런 의식을 거룩하게 치르거나 헌신을 하면 마치 면죄부처럼 죄가 없어지거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눈에 보이는 면죄부가 없을 뿐이지 그들은 모두 스스로가 정한 회계장부를 통해 알아서 죄를 더하고 탕감한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의 썩어빠진 이론은 죽지 않고 남아 인간의 무의식에 파고들었고 기어이 인간 스스로가 자체적으로 자신의 죄를 판단하게까지 만든 것이다. 진정한 개혁의 대상은 제도만이 아닌 인간 자체여야 할 것이다. 성령에 의지한 인간의 자발적 순종과 이를 따르는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것밖에는 답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위 영적인 부분만을 치중하면 하나님께서 더 큰 상을 주실 거라는, 자칭 고행을 힘쓰며 세상과는 담을 쌓고 지내려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영과 육은 철저히 분리가 되어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육은 곧 죽음이요, 영만이 살 길인 것이다. 그들에겐 기독교의 본질 중 하나인 하나님의 성육신도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세상은 장망성에 불과하기 때문에 인생무상에 동조를 하며 남은 인생을 자칭 영적인 일에만 매진하다가 예수님의 재림 때 세상이란 난파선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타고 올라가 구원받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구원이란 자신들처럼 영적인 사람들만 받을 수 있는 특권인 것이다. 세상과 분리되어 자신들만 저 하늘 어딘가에 있을 천국으로 선택 받아 올라가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인간도 세상의 일부로서 모든 창조물들이 회복된다는 진정한 구속의 의미는 그저 이단적이고 사탄적인 적그리스도 사상일 뿐이다. 알다시피 창조세계는 구원 받기 전에만 허락된 인간 삶의 일회용 배경이 아니다. 우리는 창조세계 바깥으로 구속 받는 것이 아니라, 구속된 창조세계 자체의 일부로서 구속 받는 것이다. 이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의미와도 직결된다.
사람을 압도하는 예배 분위기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이라고 착각하는 교인들의 마음 속에서는 뭔가를 숭배해야 한다는, 그래야 미래를 보장받고 안전할 수 있다는 무속적인 종교심이 발동하기 마련이다. 특히나 뭔가에 실패를 경험하고 교회를 찾은 경우, 뭔가에 상처를 받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고 교회를 찾은 경우, 자칫하다간 압도적인 예배 분위기로 인하여 뭔가에 새롭게 잡히는 꼴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교인들의 '열심'이라는 의미는 퇴색되어 이제는 더 이상 긍정적인 이미지가 아닌 오히려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그릇된 열심은 결국 자기중심적인 원죄의 연장선에 있을 뿐이며, 기독교가 개독교라는 이름을 갖게 만든 장본인이다. 우리의 열심은 필요하다. 하나님을 아는 열심, 성령에 의지하려는 열심, 삶과 신앙을 일치시키려는 열심, 정의로 사랑을 행하고, 사랑으로 정의를 행하는 열심, 레위기 19장에 나오는 거룩의 참된 모델이 되려 안간힘을 쓰는 열심 말이다.
교회를 옮긴다며 오늘이 마지막이라며 인사를 건네는 한 집사님 가정이 있었다. 그 동안 함께 기도제목도 나누고 교제했었던 찬양팀원에게도 너무나 갑작스러운 선언이었다. 일방적인 선언, 난 솔직히 무례함을 느꼈다. 교회를 옮기는 건 숱하게 보아 왔지만, 이번엔 좀 의미가 달랐다. 물론 허심탄회하게 기도제목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가 되지 못한 우리들의 잘못도 부인할 순 없지만, 어떻게 그런 폭탄 선언을, 그것도 마지막 날 하고 가뿐히 떠나 버릴 수 있었던 것일까? 시스템이 갖추어진 대형 교회로 간다는 말을 들었다. 떠나는 명목상의 이유는 아이들의 교육 때문이었다. 알다시피 대형 교회 주일학교는 선생님들이 전도사나 부목사 급의 목회자의 지도 아래 조직적으로 움직인다. 반면, 작은 교회의 경우, 그런 시스템을 도입하기에는 경제적 여건이 모자라기 때문에 아무래도 주일학교의 여건은 대형교회의 그것과 비교되기 마련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작은 교회의 주일학교가 더 낫다거나 대형교회의 주일학교가 못하다는 말이 아니다. 또한 교회를 옮기면 절대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난 그저 좀 서운하다는 것이다. 사람이야 왔다가 떠나고 또 새로 오는 만남을 이루기 마련이지만, 참... 뭐라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없는 건 이 문제 역시 위에서 언급한 교회의 오래된 문제의 일면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그 중 일부라는 점도 그저 한숨만 쉴 뿐, 뾰족한 답을 내놓지 못하는 내 모습을 비웃는 것만 같다. 또한 위에서처럼 문제를 언급한다고 해서 실제적으로 내 앞에 벌어진 문제를 마주할 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자괴감도 한 몫을 단단히 한다. 아무튼 표면적인 내 바람으로는 옮긴 교회에서도 신앙생활 잘하시고 걱정하셨던 아이들의 교육 문제도 해결을 받으셨으면 좋겠다. 아, 그래도 이 언짢은 기분은 도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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