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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faith

떠밀림

가난한선비/과학자 2017. 12. 17. 10:51

사실 우리는 떠밀린다. 시대의 조류에, 그리고 속한 국가와 공동체와 가정 안에 보이지 않게 흐르는 기류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잘 인지하지 못할 뿐, 우린 모두 그 흐름에 떠밀리며 산다. 어쩌면 인간의 지혜란 떠밀리는 흐름 속에서도 가능한 한 영향을 덜 받게 해 주는 노하우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이성적인 생각으로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지라도 떠밀리는 프레임 안이다. 뛰어봐야 벼룩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만물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지만, 사실 인간은 전체 프레임을 지각할 수도 없는 미개한 존재일 뿐이다. 어딘가에 위치해 있지만, 그 위치가 전체 프레임 안에서 어떤 좌표를 가지는 지는 알 수 없다. 마치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함에도 우리가 전혀 회전력을 못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의 정체성이 단지 그 프레임 내부에서 부여된 것이라면, 자신과 한몸이 된 떠밀림에 순응하면서 그 안에서의 필요를 충족시키며, 될 수 있는 한 많은 이득을 얻어내면 된다. 법과 질서조차 그 프레임 내부에서 만들어지고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전체 프레임의 붕괴를 유도하지만 않는다면, 적당한 불의는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이 누구인가. 적응의 천재들 아닌가. 잔잔한 불의는 전체 프레임의 흐름의 각도를 야금야금 변화시킨다. 물론 인간은 그 변화를 눈치챌 리가 없다. 변화의 순간 기울기 값은 거의 제로에 가깝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 변화는 기어이 기존에 있던 모든 기준의 수정을 요구하게 되고, 이는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더욱 큰 변화를 유도한다. 그것도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말이다. 허나, 이 때 쯤이면 그 속도를 느끼는 자들이 하나 둘 생겨난다. 민감한 자들은 어디나 존재하는 법이다. 그들은 본의 아니게 마치 선지자나 예언자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들의 존재와 선포는 전체 프레임의 마지막 희망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그들은 무시되고 조롱당하며 사라져간다. 그리고 각도는 더 틀어진다. 최고의 지성을 가진 인간도 결국 천천히, 아주 천천히 뜨거워지며 끓게 되는 물 안에 들어 있는 개구리인 것이다. 구원이 물 밖에서 와야만 하는 이유다. 구원은 프레임의 외부에서 공급된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근원에 대해서, 생명과 우주의 근원에 대해서 일찌감치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많은 사유를 거치며 많은 답을 냈다. 안타깝게도, 그러나, 그 질문을 하며 답을 했던 인간조차도 프레임 안에 있었다. 질문은 타당했으나 답은 그저 시대에 조류에 맞고 타당하게 보이는 가설일 뿐이었다. 질문을 가능하게 했던 주요 요소인 인간이란 존재도, 그리고 그 질문을 했던 인간도 모두 프레임 안에 있었지만, 정작 답은 프레임 안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끊임없이 그 질문이 돌고 돌며, 때론 곁가지의 질문을 만들어내고 수많은 사유자를 탄생시켰지만, 여전히 그저 그러고만 있는 처지가 바로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프레임 밖에서 왔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 프레임을 창조한 신에게서 메시지가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소식조차도 프레임 안의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이거나 착각인지 뚜렷하게 확인할 방법이 묘연했다. 신이 모든 인간의 눈 앞에 떡 하니 나타나지 않는 이상 인간은 다른 인간으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 들어야만 했다. 책이 만들어졌다. 신의 메시지, 즉 계시가 적힌 책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책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여러 책이 만들어졌고 각자 다른 신을 말하고 있었다. 교류가 없던 시절이야 자신이 속한 곳에서 나타난 책에 적힌 신을 믿으면 되었지만, 서로 교류를 하다보니 자신들이 철떡같이 믿었던 책과 신이 그저 여러 종류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신뢰가 떨어졌다. 믿음이 사라졌다.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구원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인간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야 했다. 물론 그 순간에도 물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직접 신이 프레임 안으로 침투한 사건이 생겼다. 이는 오래 전부터 성경이라는 책에서 예언되어졌었으며 그 약속이 성취된 사건이었다. 바로 우리가 아는 예수다. 예수는 탄생하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으며 재림을 약속하셨다. 예수는 완전한 인간이셨고 또한 완전한 신이셨다. 그러한 존재는 자고로 없었으므로 인간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경험과 이성에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는 인간에게는 결코 납득하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프레임 외부로부터 오는 구원의 형태였다. 신이 인간의 프레임 안에 침투하신 사건, 도무지 상상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며 받아들이기 어려운 성육신 사건, 프레임 자체가 죄악으로 물들어 있다는 사실, 그 프레임을 하나님나라로 변화시키는 복음, 이 모든 신비한 사건들은 인간이라는 프레임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성령을 주시고 그 역사가 필요한 이유다. 복음은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는 프레임 내부에 유한한 존재로 살아가지만, 우리의 정체성은 프레임 외부로부터 왔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나라의 나그네 된 백성이다.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 따라 흐르는 존재가 아니다. 때로는 흐름에 저항하기도 하고 역행하기도 한다. 세상의 지혜와는 구별된 지혜를 추구한다. 가치관과 세계관이 다르다. 자극에 대한 반응이 다르다. 우리 안에는 성령이 거하시고 인도하시며 우린 믿음으로 그 인도에 순종할 수 있다. 자발적인 믿음의 순종, 바로 이것이 프레임 외부에 있는 더 큰 프레임의 흐름이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 흐름에 맞추고 있는 것이다. 속한 프레임에 저항하거나 역행하는 건 더 큰 흐름을 인지하고 그것에 맞추다 보니 나타나게 된 현상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프레임의 타파도 아니고 붕괴를 기원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일상에 깃든 '하나님나라'라는 프레임의 흐름을 읽고 그것에맞추며 살아가는 것. 바로 여기에 믿는 자의 정체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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