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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파게티.
뭔가가 없어져봐야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건 미련한 탓일까, 교만한 탓일까? 당연한 얘기겠지만, 해외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한국 음식에 대해 가지는 생각은 사뭇, 아니 엄청 다르다. 이를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 ‘희소성의 논리’로 대충은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미국의 경우, 엘에이나 시카고, 뉴욕 등 대도시에 살지 않는 한인들은 특히 한국 음식을 언제나 고파한다. 동경한다. 숭배한다. 배경처럼, 공기처럼, 아무런 생각 없이 당연하게 우리의 삶의 기저를 이루고 있던 그것을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하거나 예상 밖의 댓가를 치러야만 얻을 수 있는 상황, 결코 겪어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이성적인 부분을 충분히 넘어서는 문제이며, 다분히 그 사람의 인격까지도 몽땅 드러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한국 성인 남자들이라면 비슷한 경험을 한 번씩은 해봤을 것이다. 나도 그랬듯, 입대 후 첫 휴가 때 대부분의 장병들은 아마도 라면과 김치를 찾지 않을까 한다. 늘 배고플 때 구름풍선처럼 머리 속에 떠오르는 그림은 김이 용솟음치며 팔팔 끓고 있는 꼬들꼬들한 라면이다. 거기에 계란이 하나 툭 터트려지고, 게다가 김치까지 곁들어진다면 금상첨화인 것이다. 행복 그 자체인 것이다. 강제로 빼앗긴 인간의 기본권리 (라면 끓여먹을 수 있는 권리)를 되찾은 그 광복의 순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오하이오주에서 3년 반, 인디애나주에서 1년 반을 살 동안 난 한국 음식에 대해 정말 미쳐있었던 것 같다. 몸은 미국에 와있으나 혀는 한국에 그대로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햄버거나 치킨 몇 조각, 피자 한 두 조각, 수프, 샐러드 등등이, 밥 먹고 나서 먹는 간식이 아닌 당당한 한 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난 처음에 충격을 받았었다. 그런 선입견이 미국 생활에 익숙해지는 걸 방해했음은 두말할 필요 없을 것이다. 난 언제나 한국적인 매운맛과 짠맛을 찾았다. 덕분에 난 한국음식을 환원시킬 수 있었다. 과연 무엇이 나의 혀를 충족시키는지 일종의 분석적인 테스트까지 하게 된 셈이었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분석 결과로는 매운맛과 짠맛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내게 정답은 의식적인 수준 너머에 있었다. 한마디로 향수였다. 한국에서 그런 음식을 먹을 때 나를 이루고 있던 다른 환경 요소들, 이를테면 부모님, 가족, 친구 등의 부재, 그리고 그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미국에서 아무리 똑같은 라면을 끓여먹어도 그 맛은 예전에 각인된 그 맛을 재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 엘에이에는 한국 식당도 골라 갈 수 있을 뿐더러 대형 마트조차 그렇다. 왠만하면 영어 한번 하지 않고도 한인타운 근처에 산다면 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한국 음식에 대한 나의 동경은 그만치 사라져버렸다. 이젠 오히려 햄버거도 가끔 먹고 싶고, 피자도 먹고 싶다. 정말 웃기지 않은가. 인간이란 존재가.
한 달전 차로 10분 거리에 H마트가 생겼다. 며칠 전 장보다가 짜파게티가 세일을 하길래 아내가 보지 않을 때 하나 덥썩 집어서 쇼핑카트에 찔러넣었다. 신라면은 질리도록 먹었지만 짜파게티는 미국 와서 두 번째로 먹어보는 것이었다. 갑자기 오하이오와 인디애나에서의 내가 내 안에서 살아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환희가 느껴졌다. 짜파게티를 보는 순간에 말이다.
그 다음 날 짜파게티를 끓여먹었다. 아들에게도 멋적게 소개하면서 맛있게 한 그릇 덜어줬다. 그런데 그 맛이 나지 않았다. 뭔가 빠진듯한 맛, 덜 짠 것 같기도 하고, 양념스프가 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영 성에 차지 않았다. 아들은 다행히 맛있게 쩝쩝대며 입 주위에 짜장을 묻히며 잘 먹어줬지만, 난 실망스러웠다. 아.
또다시 확인한 셈이다. 한국에 대한 그리움, 그것은 결코 음식으로만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미국 오고 나서 한국에 가 본 건 딱 한 차례, 벌써 5년 전이다. 영주권이 나오면 휴가내고 한 번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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