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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미국에 포닥 온다는 후배에게 썼던 편지. 나름 도움이 될만한 내용이라 판단했기에 공유합니다. 참고로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내용은 아닐 것이니, 자신은 예외였다고 발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참고로 저의 열등감의 반영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ㅜㅜ 읽으신다면 알아서 해석해 주셔요.**
XX에게,
먼저 새로운 환경에서 science를 해볼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축하한다. 그러나 난 틀에 박힌 조언이나 그저 기억에도 남지 않을 듣기 좋은 말을 해주고 싶진 않다. 그런 것들은 이미 충분히 들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더 듣게 될 테니까.
글쎄다. 혹시나 미국 포닥을 와서 한국에서 못 이룬 성공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이 글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 이쯤에서 그냥 찢어 버리는 것이 좋겠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빨간 모자 쓴 유격 조교나 교관으로 네 앞에 서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만, 현실적인 도움을 주고자 이렇게 시간을 내어 글을 쓰게 됐다. 적어도 내가 겪어야만 했던 시행착오는 네가 굳이 거치지 않을 수 있는 찬스가 생길 수 있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아메리칸 드림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런 것은 없어진 지 이미 오래다. 미국 포닥을 위해 적어도 몇 달은 준비했을 텐데, 그 와중에 아마 한번쯤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통계적인 숫자들을 접해봤을 거라 생각한다. 미국 와서 한국인의 근면성실함으로, 거기에다 실력도 겸비했다면, 대부분의 포닥들이 교수 자리를 꿰차던 시대는 끝났다. 이건 나의 불평도 아니고 시니컬한 비판도 아니며, 팩트다. 그런 시대는 10년 전에 이미 끝나가고 있었다. 난 옆 실험실이 문 닫는 것도 직접 목격했으며, 연구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짤리는 포닥들도 현장에서 수없이 만났다. 한국이란 온실에 앉아서 이런 얘기를 들으면, 아마 "실력이 없어서 그랬나 보지." 정도로 쉽게 생각할 수 있을 텐데, 객관적인 논문 실적이나 논리와 추론 능력, 창의력, 디스커션 능력, 그리고 언어 등등을 비교하면, 그들은 너보다 결코 뒤떨어지는 친구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날 봐라. 내가 인격적인 면에선 모자람이 많았지만 (교만함을 회개한다. 그러나 점점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사이언스 능력은 절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 역시 그런 실력을 쓸 시기와 장소를 만나지 못했던 탓인지 박사 후 9년째임에도 여전히 교수가 아님을 기억해라. 그리고 "먼저 인간이 되야지. 쯧쯧쯧" 하는 늙어빠지고 아무런 답을 줄 수 없는 비논리적이고 비과학적인 생각이 드는 사람은 내 글을 읽지 않아도 좋다. 그런 사람은 듣고 싶은 것만 찾아서 듣고 다니며 자기가 듣기 싫은 말을 하는 사람을 정죄하고 이단시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 거짓말쟁이일 테니까. 그리고 나는 행여나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신비주의자나 이교도, 아니면 무속인이라고 칭하고 싶구나. 어쨌든 결론은, 실력과 열심, 또는 노오력이 포닥 성공을 절대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에 와보면 피부로 느낄 수 있겠지만, 포닥의 성공은 절대 어떤 한가지 요소에 비례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먼저 사람이 되야 한다거나, 신앙이 좋아야 된다거나, 기도를 열심히 했어야 한다거나, 뭐 이따위의 비논리적/비합리적/비과학적/나이브한 생각을 가졌다면 제발 얼른 잠에서 깨어나라. 현실은 교회도 아니고 제자훈련 공동체도 아니다.) 공식화하는 건 별 의미도 없고 나도 싫어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설명을 위해 굳이 리스트를 만들어 본다면, 성공을 위한 세가지 요소는
(1) 평균 정도의 실력 (내가 아는 너는 충분히 평균 이상이다. 굳이 백분율로 하자면 85% 정도 된다고 생각하면 오차가 크진 않을 거다),
(2) 좋은 배경 (인맥, 기혼/미혼 여부, 건강, 경제상황 등),
(3) 행운 (적절한 시기와 적절한 장소 적절한 프로젝트, 그리고 적절한 PI의 적절한 서포트)
정도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나 개인적 경험으로 가장 교수가 많이 되는 케이스는 다음과 같았다.
(1) 평균의 실력, (2) 인맥 (아는 교수의 끈, 미혼, 신체 건강, 중산층 집안의 자녀), (3) 기똥찬 시기, 기똥찬 PI의 기똥찬 서포트.
이런 것들이 갖춰지지 않고서 교수가 되는 케이스는 미안하지만 최근 6년 동안 본 적이 없다.
마찬가지다. 3-5년 빡시게 포닥에 올인하면 조교수 자리를 꿰찰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앞서 말했듯이 시대착오적이며 유아적 발상이다. 그런 코스가 아직도 성실한 자의 공정한 댓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 또한 현실을 벗어난 이상주의자의 발상이다. 성실한 땀이 이기는 시대는 이미 끝난 지 오래다. (설마 여기서 또 기도 많이 하거나 성령 충만/인도/역사 받으면 상황과 상관없이 조교수/부교수/정교수 승진이 보장되는 것처럼, 무속적으로 생각하거나 믿는 사람은 없겠지?)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세가지 요소가 다 갖춰진다면 상위 1% 안에 들어가게 되어, 예전엔 당연한 코스라 생각했었던, 아카데미에서 살아남아 PI가 될 수 있다. 이게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통계학적이고 경험적인 결론이다. 거의 팩트라고 할 수 있으니 시작하기 전에 알고 있는 건 절대 해롭진 않을 거다.
너 같은 경우는 나와 마찬가지로 (1)번은 충족시켰으니 (2)번과 (3)번이 남았는데, 글쎄다. (2)번은 적어도 나보단 나은 것 같고, (3)은 뚜껑 열어봐야 알 수 있는 거니 아직은 미지수겠지. 결론은, 시기를 따지지 않는다면, 네가 나보단 훨씬 더 좋은 입지에서 미국 포닥을 시작하는 셈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장황하게 쓰는 건 대부분의 미국 포닥 지망생들의 목적이 아메리칸 드림과 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아니면 솔직하기라도 하지, 기독교인이라면 자신의 성공욕을, 내가 그랬듯이, 다른 그럴듯한 거룩한 이유들로 숨겨야 하는 잔꾀도 필요하게 된다. 끝까지 이중적인 모습인 게지. 미국에 오면 논문을 더 잘 낼 수 있다거나 PI의 이름값을 이용해서 빠른 속도로 성공을거머쥘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을 너도 해봤을 거다. 물론 그런 면도 없진 않다. 다만, 그런 케이스에 들기 위해선 앞서 말한 (1)번과 (2)번이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전적으로 PI의 서포트에 의존적인 것일 테니까 말이다. 한마디로 운명적인 만남이 포닥의 성공을 좌지우지한다고 볼 수 있다. 네가 (3)번이 충족되어 3-5년 이내에 교수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절대로 하나님이 인도하셨다거나 하는 거짓 겸손의 간증은 하지 말길 바란다. (3)번이 충족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인도가 아닌 게 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런 성공 자리에서의 거짓 겸손은 항상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엘리트만을 사용하진 않으신다. 사회적 영향력은 영적 영향력과 결코 비례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엘리트나 성공자가 되어야만 하나님나라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이왕이면 대통령이 되어서 전도/선교해야지 청소부가 되면 되겠느냐... 뭐 이따위 엘리트사상, 선민사상에 빠져 있다면 얼른 미국 나오기 전에 빨간 알약을 먹고 그 매트릭스에서 일단 빠져 나오라고 말해주고 싶다.
난 네가 미국 포닥 오는 마음의 중심이 이랬으면 한다. 성공이나 논문 실적의 효율성, 더 큰 인맥, 학문의 수준 등과 같은 이유가 너의 우선순위에 있지 않았으면 한다. 그런 것들은 따라오는 거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따라오지 않을 가능성도 충분히 많이 존재한다. 그런 것들이 우선순위였는지 아닌지는 그걸 잃어보면 알 수 있다. 잃어보지 않으면 웬만해선 모른다. 자기자신까지도 오랜 시간 동안 잘 속여왔다면 알기 쉽지 않지. 그러나 잃기 전에도 알 수 있는 방법은 진지하고 솔직한 조언을 귀 기울여 듣고 하나님 말씀과 함께 묵상하며 깨닫는 거다. 성령인도란 계획했던 일의 진행 성과에 따라 평가되는 게 아니다. 즉 자기 계획 성취가 성령인도였다고 훗날 재해석하는 것으로 성령인도를 해석하면 안 된다는 거다. 그 인도를 받기 위해선 먼저 자기 내면의 콘트롤 타워에서 먼저 내려오고 예수님께 그 자리를 드려야만 한다. 그것이 되어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그 "성령인도"는 거짓이다. 똑똑한 사람이라면 그 거짓을 진짜인 것처럼 둔갑시킬 줄 아는 재주가 있기 때문에 남들을 속일 순 있겠지만, 절대 자신과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 물론 그 사실을 깨닫기 위해 나처럼 미국에 와서 특이한 경험을 하며 실패라는 걸 해봐야 하는 사람도 있지만 말이다 (나의 미국 경험이 궁금하면 내 페북에 들어와서 "가치관이 바뀔 때까지"란 제목으로 연재한 10편의 글을 읽어보면 된다). 이 글이 너나 다른 동료들에게 용도로 쓰인다면 난 정말이지 만족하고도 남을 것 같다.
정리하마.
1. 아메리칸 드림 (성공지향적 가치관 or 성공욕)이 있다면 당장 버려라.
2. 실력과 열심, 노오력이면 될 거라는 믿음이 있다면 당장 버려라.
3. 24시간 기도하면 성공할 거라는 믿음이 있다면 당장 버려라.
4. 엘리트주의 사상이 있다면 당장 버려라. 그런 걸로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더럽히지 마라.
5. 다만, 하나님나라 관점으로의 가치관을 가져라.
6. 미국 포닥 생활은 낯선 곳에서의 삶을 포닥이라는 신분으로 경험해 보는 거다. 그 자체엔 인생의 목적이나 올인할 가치가 없다. 포닥 성공해봤자 교수다. 교수는 교수대로 또 다른 고난의 길이 시작된다. 넌 20대도 아니고 싱글도 아니다. 40대에 이르렀고 두 아이의 아빠다. 꿈을 포기하라는 게 아니라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지혜로워지란 얘기다.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의 자세를 가진다면 정말 곤란하다.
7. 교회 시스템 (제자훈련 시스템이나 공동체 시스템)이 널 보호해 주지도 못하고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도 없다. 결국 광야에서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이 될 거다. 준비해라. 발가벗고 솔직하게 고독과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는 시간이 온다. 즐기기보단 견디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을 때가 온다. 준비해라.
8. 다만 주어진 일에 대해선 작은 일이라도 성실히 충성해라.
9. 미국에선 인간관계가 한국의 그것과는 다른 점이 많다. 그래도 중요한 건 진정성이다.
10. 절대 직장 일 때문에 가족을 희생시키지 마라. 가족이 희생되는 일이 생긴다면,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그 일은 맡으면 안 되는 일이다. 함께 갈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구름 위에 떠있는 하나님이 아닌, 실제 너의 일상 가운데 인도/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을 알고 기쁨으로 동행하며 잘 견뎌내길 바란다.
2017년 5월 19일 토요일 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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