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in faith

원죄

가난한선비/과학자 2018. 2. 4. 04:33

**김회권 목사님의 '모세오경'을 읽으며 창세기 5장까지 왔습니다. 130페이지를 읽었으니 전체의 10분의 1도 읽지 않은 셈입니다. 성경이 재밌습니다. 읽고 묵상한 것을 글로 써 보았습니다. 그리고 페친들과 나누고 싶어서 여기에 올립니다.**


원죄.


창세기에 의하면,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진 인간은 선악을 판단하는 신적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얻어진 인간의 선악 판단력에는 진정한 선과 악에 대한 이해와 분별력이 없었다. 밝아진 눈으로 인간이 읽어낸 선과 악은 자기의 이익과 손해였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각자에게 주어진 일상의 조각들로부터 선과 악에 대한 이해와 분별, 그리고 판단을 하나씩 배워나가도록 디자인되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뱀의 개입으로 인해 선악과를 따먹어버림으로써 인간은 단박에 선악을 판단하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꼭 필요한 점진적인 배움과 훈련의 과정을 훌쩍 건너뛴 채 결승점에 있는 테이프만 끊게 된 꼴이었다.


목적지향적 인간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정당한 길을 걷기 보단 샛길을 찾는 경향이 있다. 특히, 끝이 보이지도 않고 아무런 진전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 과정이 지루하고 비효율적이고 불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충만해질 때, 우리 인간은 샛길을 찾아 나선다. 결승선에 남들보다 빨리 도달하기 위해서는 때론 그 샛길이 불의와 결탁되어 있어도 상관없었다.


목적 달성은 인간에게 있어서 이익이다. 반면 그 이익을 위한 정당한 훈련과정은 손해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을 판단하게 된 인간에겐 그것이 곧 선과 악이었다. 인간은 그때나 지금이나 선악을 판단하며 불의를 행하고 그것을 합리화한다. 자기중심적인 선악 판단권의 쟁취와 그로 인해 밝아진 눈은 씻지 못할 인간의 숙명적 비극인 것이다.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 치유 과정과 여리고 성의 함락 과정에서 우린 중요한 메시지를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장군이 왔는데도 얼굴도 내비치지 않고 신하를 보내어 고작 엘리사가 전했던 말은 요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담그라는 것이었다. 괘씸하기도 하고 화가 난 장군을 설득한 건 그의 종이었다. 엘리사의 제안을 그대로 행한다고 해서 손해 볼 것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어렵지도 않고 밑져야 본전이지 않겠냐는 논리였다. 다행히 그 말에 설득된 장군은 요단 강에 들어간다. 여섯 번 들어갔다 나왔을 때만 해도 몸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일곱 번째 들어갔다 나왔을 때에 완벽히 치유함을 받게 된다. 여리고 성 역시 여섯 째 날까지 하루에 한 바퀴씩 돌 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일곱 째 날 일곱 바퀴를 돌았을 때에야 여리고 성은 완벽히 무너졌다. 나아만 장군이 여섯 번째 몸을 담글 때까지 1/7씩 몸이 낫는 징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여리고 성 역시 여섯 째 날까지 하루에 1/7씩 여리고 성에 금이 간다거나 무너져 내리는 징후가 전혀 없었다.


물은 1기압 섭씨 99도에서 평생을 기다려봐야 절대 끓지 않는다. 티핑 포인트인 100도가 되어야만 끓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훈련과정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지 싶다. 자신이 느껴지기에 아무런 점진적인 프로그레스가 없다 하더라도, 그저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살아 가는 것 같더라도, 그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 순간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감사함으로 과정에 충실하고 성실하게 임하는 것. 오늘을 그날처럼 살아가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참 순종이 아닌가 싶다. 신뢰의 최고의 표현은 순종이라 생각한다. 순종 없는 성취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단박에 선악 판단권을 가진 것과 흡사하다. 결국 뱀이 우리에게 빼앗았던 것은 순종이었던 것이다. 정당하고 의롭게 하나님을 알고 믿고 신뢰해 나가는 과정을 빼앗았던 것이다. 우리가 겪는 일상의 크고 작은 실패와 성공들도 이런 큼직한 관점에서 본다면 모두 그 과정에 속해 있다. 계획한 대로 되어지지 않고 열매가 없는 것처럼 느껴져도 우리는 옳은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신뢰해 나가는 과정, 때론 다람쥐 쳇바퀴처럼 느껴질 때도 있는 우리들의 일상,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신앙생활이요, 나아가 인간에게는 인생일 것이다.

'in fai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리아 산으로  (0) 2018.02.13
죄: 관계의 파괴  (0) 2018.02.07
모세오경  (0) 2018.02.01
생물  (0) 2018.01.22
실제적인 것  (0) 2018.01.16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