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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해질 용기.
한 때는 내 목표였다. 그러나 이젠 높이 있어 왠만해선 닿을 수 없는 어떤 특정한 소수 그룹에 들어가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아니, 현실적으로 보면 난 더 이상 그 그룹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가치는 떨어져가고, 대신 젊고 경쟁력 있는 사람들은 더욱 넘쳐난다. 그리고 난 지치기도 했고, 한 우물 10년을 넘게 치열하게 팠으니 충분히 한 분야에서 달려봤다고 말할 수도 있다.
처음엔 이런 생각에도 자조적인 면이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난 꽤 익숙해졌고, 그 동안 무시해왔거나 지나쳤던 인생의 다른 즐거움과 가치를 발견했으며, 절대 못 만날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러면서 오히려 내 삶이 더 풍성해짐을 느낀다. 과학자로 훈련 받았고 지금도 밥 벌어 먹을 줄 아는 수단 역시 과학하는 것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을 때까지 그 세계 안에 보이지 않게 형성된 피의 피라미드를 계속 미끄러져가며 오를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다.
누군가는 연구자가 연구하는 방향대로 이 세상의 과학과 문명이 발달한다고, 어떤 특정한 분야에서 천재가 나와야 양자도약하며 발전한다고 생각할지 도 모르겠지만, 그건 이젠 화석이 되어버린 아주 오래 전 일이다. 현실은 연구비가 지원되는 방향으로 과학은 발전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연구비를 책정하고 지원할 분야를 정하는 건 정치와 경제 분야의 사람들의 입김이 훨씬 세다. 결국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과학이어야 하지 않냐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사람에게 도움 된다는 말 자체를 조곤조곤 따져볼 필요가 있다. 결국 그 말은 비도덕적 사회라는 어떤 커다란 정치적인 세력의 요구에 시중을 들라는 말과 현실적으론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나에게 한 단계라도 피라미드의 계단을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었더라면,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멈춰야 하는 시기가 오는 법이고, 그 시기는 개인마다 다르다. 그것은 능력에만 좌우되는 것도 아니고, 운에만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 사실 메커니즘은 아무도 모른다. 결국 한 단계 올라간 사람도, 여전히 오르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과거를 해석할 뿐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다음 달이면 정확히 내가 생물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지 10년 째가 된다. 학교 이름도 한국에선 다 아는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내가 학교 명예를 실추시킨 사람 중 하나일지도 모르지만, 난 내게 주어진 길에도 의미가 충분히 있다고 믿는다. 아니, 특별해야만 의미가 있다거나 높아져야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관점에서 벗어났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그렇다. 난 평범해질 용기가 생겼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이제서야 행복해질 용기가 생긴 것이다.
다행히 그동안 진행해왔던 세 개의 프로젝트가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올해엔 아마 논문이란 형식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대학원생-포닥-늙은포닥-연구교수-조교수 트랙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은 벌써부터 가졌는데, 마무리되는 논문으로 나름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할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행운이라 생각한다. 결국 만족과 행복은 ‘지금, 여기’의 순간기울값에 있음을 자각할 때 어떤 형태로든 과학자로서의 삶은 이어갈 테지만, 피라미드와는 작별할 작정이다. 이젠 그렇개 해도 충분히 나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난 내 삶을 사랑한다. 내게 주어진 작은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행동으로 보듬어갈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나의 이런 작은 세상에도 존재할 것이다.
**사진은 헌팅턴 라이브러리에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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