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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념과 상식.
통념: 일반적으로 널리 통하는 개념.
통설: 세상에 널리 알려지거나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설.
오늘 궁금해서 위의 두 가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봤다. 내가알던 그대로였다. 그러나 오늘 페북 댓글 교류에서 통념이나 통설을 진리는 아니지만 마치 진리처럼 여기고 있는 분들을 보게 되었다. 통념에 대한 부분엔 별다른 증거가 필요치 않지만, 통념에 반하는 부분에는 증거가 필수라고 주장하셨다.
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통념은 그냥 받아들여도 되고, 통념에 반하는 것은 철저하게 증거를 요구하고 검토해야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통념이 진리가 아니라면 굳이 지킬 필요도 없고, 지키라고 존재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만약 둘 중 하나가 참이라면, 모두 적절한 증거를 요구해서 신빙성을 따져본 이후 하나를 택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만약 둘 다 아리송하여 어느 것 하나를 참이라고 증명할 수 없다면, 주관적인 해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면 그만이다. 한 마디로 믿고 싶은대로 믿으면 되는 문제다. 절대 먼저 입지를 가진 쪽이라고 해서 진리처럼 행세해도 되는 건 아니다. 아무도 그런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해석의 차원일 수 있기에, 이런 것이 왜 중요한가 싶은 생각도 있지만, 통념이라는 개념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큰 오류가 역사적으로도 있어왔기 때문에, 난 이 부분에선 누구나 조심스러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통념이 진리가 아닌 이상, 그것은 해석에 불과하기 때문이고, 통념이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그저 자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수긍하고 있는 개념에 불과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진리나 참인 명제가 다수결이나 목소리 큰 의견으로 채택되는 것인가. 난 여기서 한 가지를 말하고 싶을 뿐이다. 통념도 틀릴 수 있다고.
보통 자신이 알고 주위 사람이 알고 그 분야의 대다수가 알고 있는 것을 통념으로 알고 그것에 기초해서 지식의 확장이나 연구를 수행하게 되는데, 만약 통념 자체가 틀린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 그것은 통념을 깨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관을 송두리째 바꾸는 거대한 사건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의심없이 믿고 받아들인다고 해서 항상 참이라고 단정지을 순 없다. 상식인 사람이라면 이 말 자체를 부인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천동설이 틀렸고 지동설이 맞았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프톨레마이우스도 틀렸던 것이다. 역사적인 이 사건은 결국 과학적 진리를 올바르게 찾아내는 역할을 했고, 통념에 기대어 힘을 휘두른 교회나 그 힘 아래서 익명으로 폭력을 행사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사죄를 해야만 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확한 과학적 증거를 갖다대었음에도 불구하고 통념은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 당시에는 깨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통념에 기대는 암묵적인 힘은 실로 거대했다. 그 힘은 결국 진리를 가리는 역할을 충실히 담당했던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이 부분이다. 통념에 기대는 것, 곧 그것은 통념이란 세계에 스스로 갇히는 것이며, 어쩌면 진리를 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어딘가에 갇힌 채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먼저 알게 된 사실을 진리처럼 받아들이는 건 인간으로서 한계일 수 있다. 그러나 살다보면 그 통념에 반하는 것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내가 며칠 전에 소개했던 양희송의 ‘세계관 수업’에도 비슷한 맥락이 나온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되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이다. 통념이라는 하나의 세상에서 별 의심도 없이 수동적인 자세로 평생을 안주하며 살아온 사람에게는 이런 사건이 터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다양성에 노출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 난 생각한다. 과연 평생을 진리처럼 알아왔던 것에 반대되는 개념을 만났을 때 우린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여기에 난 인간의 성숙함이 드러난다고 본다. 무턱대고 자신이 믿어오고 수호해온 통념의 세계를 위해 새로운 개념을 반대하고 이단 취급할 것인가. 아니면, 테이블 위에 함께 올려놓고 조곤조곤 따져볼 용기를 가져볼 것인가.
첫 번째 반응을 택한 사람을 우린 보통 보수라고 부른다. 사실 그들도 따지고보면 역사적으로는 과거에 두 번째였다. 기독교 차원에서 말하자면 지금 보수세력도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게 된 종교개혁의 후손들이다. 그러나 진보가 힘이 세지고 안정화되면 보수가 되는 것처럼, 그들은 고인 우물 안에 갇혀버리는 비극을 결국에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마녀사냥당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던 그들이 이젠 당당하게 마녀사냥을 해대는 이 아이러니.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두 번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진보라고 부를 수 있는데, 난 사실 진보라는 말보단 상식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특히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것이 사랑 아니던가. 결국 자기 의견에 반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이 진리를 대적하는 것으로 몰아서 이단 취급하여 마냐 사냥하는 건 어떻게 생각해도 정당화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진리도 아닌 것에도 자기 의견에 합하면 사랑하고 반대하면 배척하는 것이 기독교의 사랑은 아니지 않는가. 사랑할만한 대상만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기독교의 사랑일 수 있을까. 난 이들은 나쁜 사람이라고 부르기 보단 비상식적이라고 봐야 더 정확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그렇다. 그들은 상식을 내려놓고, 그들의 유익을 취하며 안주하고 싶은 것이다. 왜? 자기들이 가진 것이 진리 그 자체이므로. 정말 어처구니 없지 않은가. 자신들이 진리가 아니라 해놓고 진리처럼 여기는 이 행위. 모순 아닌가.
당연한 말이지만, 먼저 알게 되었거나,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고 해서 항상 참은 아니다. 그 통념 안에 갇혀 평생을 연구에 투자해온 사람이라 할지라도, 참 안타깝지만, 마찬가지다. 자신이 투자해온 시간이 아까워서 이 당연한 명제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의도적 거절’이라고밖에 판단할 수 없다. 사리사욕에 취한 분노일 뿐이다. 그래놓고 그 분노를 마치 진리를 수호하는 의로운 행위처럼 둔갑시키는 것도 난 솔직히 역겹다. 사실 기독교 보수가 이런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욕먹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진리나 거룩함을 따지기 전에 적어도 상식적이어야 되지 않을까.
**사진은 헌팅턴 라이브러리에서 쌔벼옴.
A Match at Newmarket, no. 2: The Duke of Bedford's Grey Diomed Beating The Prince of Wales's Traveller over the Beacon Course at Newmarket by John Nost Sartorius, 1790
The Huntington Library, Art Collections, and Botanical Gardens. Gift of Dr. Charles H. Str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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