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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faith

double-minded

가난한선비/과학자 2012. 8. 10. 23:36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야고보서 1장 2-8절]

 

여기서 마지막 문장인 8절을 영어로 보면 이렇게 씌여져 있다.
"he is a double-minded man, unstable in all he does."

 

DOUBLE-MINDED.

 

마음에 의심이 있는 자가 바로 double-minded man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즉, 하나님께 무언가를 간구하여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마음에 의심이 없는, single-minded man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다는 것, 마음에 의심이 없다는 것은 어떤걸까. 만약 어떤 상황이 주어지고 선택을 해야만 할 때, single-minded로써 선택에 임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걸 의미하는 걸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어떤 중요한 선택을 하게 될 때에도 결국 최종 선택은 자기가 하게 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점은 시사하는 바가 꽤 클 것 같다. 우선 몇가지 단계를 두어 생각해 보자.

 

첫번째, 객관적인 상황파악 (문제/상황이 무엇인지 정확히 숙지하는 단계).
두번째, 확률부여 (성공/실패/위험률 등의 통계학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단계).
세번째, 파이널 리스트업 (첫번째와 두번째 단계를 거쳐 여과된 최종 항목을 남겨놓는 단계. 보통 자신만의 specific한 filter pore size에 따라 적게는 두세개, 많게는 대여섯개 정도 남는다.).

 

위의 세 단계를 기준으로 하여 생각해 볼 때, 과연 single-minded로써 선택에 임한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느 단계까지가 인본주의이고 어느 단계부터가 하나님의 인도라고 봐야 하는 걸까. 과연 딱히 칼로 베듯 구분이 될 수 있기나 한 걸까.

 

위의 세 단계를 아예 시작도 해보지 않고 전혀 상황을 알아보지도 않은채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결과를 기다리는 게 하나님의 전적인 인도일까. 정말 하나님의 전적인 인도받는다는 의미가 자기자신은 전혀 관여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날 갑자기 결과가 와버리는 상황만을 뜻하는 걸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전적인 인도라는 것이 내가 관여하고 안하고의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반대로 나의 관여여부가 아닌 하나님의 관여여부에 기준을 두어야 하는 걸까. 그리고 어느 쪽이든 all or none의 관여도에 따라야만 '전적인' 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걸까.

 

이쯤에서 다시 double-minded man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상기해 보자. 마음에 의심이 없는 자. 즉, single-minded로써 어떤 선택을 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마음에 의심이 없는 상태로 결정을 한다'는 거다. 여기서 의심이 없다는 것은 확신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고, 확신이 있다는 것은 선택 앞에서 두려움 없이 담대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를 그 복잡한 여러가지 경우의 수와 확률 앞에서도 마음을 단순케 만들며 그 중요한 선택 앞에서도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결정할 수 있게 만드는 걸까. 그리고 여기서의 확신이라는 것은 뭘까. 나의 신념이나 강한 바램을 대변하는 걸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거꾸로 살펴보면 여기서의 확신이 찬 상태는 의심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의심이 없다는 것은 그 대상이 하나님의 말씀이 전적으로 믿어지기 때문에 100% 순종할 수 밖에 없는 상태를 뜻한다. 즉, 하나님께서 어떤 선택을 하게 하시는가에 대한 질문에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가능성 앞에서도 초연하게 한가지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선택되지 않은 선택항목들에 대해선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게 아닐까 싶다. 때론 그것들의 정보를 파악하고 났을 때 하나님께서 택하게 하신 항목들보다 결국은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고 뒤늦게 더 감사할 수도 있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우린 종종 겪는다. 남의 떡이 더 좋아 보이는 상황을 우리 인간들은 자주 경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판단들도 결국 인간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의거하여 좋다 나쁘다로 구분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것들의 정보를 파악하고 나서도 가타부타 말한다는 것 자체가 별로 좋아 보이진 않는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다른 것들과 비교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나 다른 것들과의 비교를 통한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나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진정한 감사는 비교에 의해서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비교는 인간이 만든 논리이기 때문이다.

 

다시 선택할 그 순간으로 돌아가보자. 의심 없이 선택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선택사항에 대하여 마음을 확실히 주셨다는 뜻인데, 과연 그 확신에 찬 마음이나 생각이 하나님께로 부여받았는지 아니면 내가 나의 신념과 강한 바램에 기초하여 이끌어 낸 것인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선택할 때마다 그 주의 강단말씀이나 최근에 자신이 읽었던 성경구절에 정확히 부합한 선택항목이 존재하여 말 그대로 말씀에 의거하여 선택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져야만 하는 걸까. 아니면, 하나님이 꿈에서 나타나시거나 환상을 보여주셔서 선택할 항목을 쪽집게처럼 골라주셔서 선택하게 되야만 내 의지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무엇을 기준으로 해야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과 마음이었다고 믿고 선택에 앞서 담대할 수 있을까. 과연 누가 보아도 공감하고 인정할 만큼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할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알기론,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게 존재하기나 했다면 이미 성경이든 성경에 기반한 여러 서적들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가 하루이틀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각과 마음인지 그저 나의 생각과 마음인지를 분별할 수 있단 말인가.

 

필자는 여기서 객관적인 지표는 없지만 주관적인 지표는 존재한다고 본다. 그것도 여러 모양새로. 많이. 즉, 개개인의 믿음에 따라 그 기준이 보이지 않게 존재하고 있다는 거다. 때로는 남들도 알만큼 그 기준이 명확하게 보여 선택할 때 별 어려움 없을 때도 있고, 때로는 자기 자신도 확신이 없을만큼 그 기준이 명확하지가 않아 난처할 때도 있다. 하지만 분명히 그 기준이 존재한다는 건 여러 믿음의 선진들에 의해서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점을 짚고 넘어 가야 한다. 주관적인 기준. 그렇다면 주관적이라는 건 뭘 뜻할까. 아마도 하나님과 나 자신과의 일대일 관계를 말하는 것일테다.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고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 자녀가 된 자들만 누릴 수 있는 특혜다. 아버지되신 하나님께선 자녀들인 우리를 선한 일로 인도하신다. 구약 때는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셨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이 말세지말에는 성령의 감동으로 씌여진 성경 말씀으로 그리고 하나님께선 성령으로 직접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들을 인도하고 계신다. 여기에 중요한 점이 있다. 성경 말씀이 물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성경 말씀만을 지표로 삼고 살아가는 건 신앙생활이 아니다. 성령이 내주하셔서 역사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감사함으로 체험하지 않는다면 성경은 그저 좋은 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성경이 좋은 책이라는 건 인정하고 있으며 삶에서의 교훈을 얻기 위해 성경을 읽는다. 그리고 거기서 얻은 유익한 정보를 통해 그들 자신들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 안엔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도 없고 하나님께 기도도 할 수 없는 신분에 속해 있으며 결국 평생 착한 일로 타의 모범을 보이는 삶을 살았더라도 죽어서는 심판을 면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를 잘 유지한다는 것은 성령의 내주, 역사를 감사하며 성령의 인도따라 살아가면서 지속적으로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인 양식으로 하는 삶을 말한다.

 

우리가 찾고 있는 객관적인 기준은 그러므로 어찌보면 평상시의 성령인도를 잘 받지 못하지만 머리만 큰 하나님 자녀들의 멍청한 질문에 답하는 거나 다름이 없을 수도 있다. 질문 자체가 틀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는 신자라면 그 어떤 어려운 상황이나 중요한 선택 앞에 서게 될 때에도 마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확신이 분명 존재할 것이며 그러한 어려운 상황들도 다르게 보여 어렵지 않게 넘어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즉, 모든 것의 근원은 평상시 하나님과 얼마나 동행하며 살아가느냐에 달렸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우린 자꾸만 이러한 삶을 어떻게 하면 평상시에 더 잘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보단, 살아가다가 종종 만나게 되는 '커다란' 일 앞에서 어떻게 그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사단의 교묘한 속임수에 우린 매일 농락당하고 있는 거다. 앞으로도 또 속을 때가 많겠지만, 이런 모든 질문들이 결국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게 만드는 사단의 속임수가 둔갑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영적 싸움에 승리하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장 3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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