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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민턴.
복학 후, 남아있던 1년 반의 학부를 마치고 나는 별 망설임 없이 같은 학교 대학원을 지원했다. 2002-3년 겨울이었다. 원하는 곳에 갈 수 있었고 과학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체감하며 연구에 올인했다. 정말 즐거웠다. 그때가 내가 가장 사이언스를 즐기고 사랑했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즈음부터였다. 실내체육관에서 배드민턴을 치기 시작했던 때는.
나 역시 그 전까지만 해도 동네 약수터 배드민턴이 배드민턴의 전부인 줄 알았다. 코트에서 룰을 지키며 셔틀콕과 라켓이라는 것에 돈을 지속해서 지출해야만 하는 운동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시간 정도 재미로 치는 것에 불과했던 배드민턴이 시간이 갈수록 흥미진진해져 갔고, 함께 치던 동료들 사이에서도 경쟁심 비슷한 긍정적인 스트레스가 적당하게 따라주어 배드민턴을 치는 시간은 점점 더 늘어갔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배드민턴을 치러 갔고, 그래서 나는 사우론의 눈이 주시하는 타겟이 되었다. 나는 생명과학과가 아닌 체육과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교수는 처음에는 은근히 나중에는 드러내놓고 내가 배드민턴 치러가는 것을 싫어했다. 저녁 먹고 밤에 치러 갔던 건데도 말이다. 암튼 그땐 그랬다.
교수의 갈굼에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배드민턴을 즐겼다. 동호회까지 가입해서 아줌마 아저씨들과 어울렸고 대회도 나갔다. 실력은 늘 수밖에 없었고 예전에 함께 치던 동료들과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2007년 여름, 논문을 서브밋하고 이제 억셉만 되면 졸업할 수 있는 시기였는데, 교수가 서울로 옮긴다고 했다.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는 그 당시 임신을 했고, 인천으로 이사한 나는 배드민턴을 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자연스레 배드민턴 라켓에는 먼지가 쌓여갔다.
두 달 전에 배드민턴을 시작한 것은, 그러니까 약 10년만에 다시 라켓을 잡은 셈이었던 것이다. 한 달 정도는 적응하느라 삭신이 쑤시고 맘대로 되지 않았는데, 두 달째가 되니 예전의 동물적 감각이 대부분 살아난 것 같다. 덕분에 살도 빠졌다.
대회를 나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동호회의 챨리라는 분이 자기가 40대 마지막을 우승으로 장식하고 싶다고 나더러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수차례 간곡히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40대 마지막이라는 말에 내 마음이 움직였던 걸까. 그러자고 했다.
오는 토요일 엘에이 전체에서 개최하는 배드민턴 대회에 남자복식과 혼합복식 두 종목에 출전하게 됐다. 전혀 예상에 없던 일이라 잘해보고 싶다는 마음조차도 먹을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챨리에게 내가 선물할 수 있는 게 우승이 된다면 참 좋겠단 생각이다. 그리고 혼합복식 파트너는 아직 얼굴도 모른다. 대략난감이다.
어쨌거나 인생의 후반전의 키워드는 탐험이기에 이것도 좋은 경험으로 만들어 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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