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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향 가득한 투명한 달밤.

마루야마 겐지 저, ‘달에 울다’를 읽고.

시와 소설의 절묘한 조화. 읽는 내내 한 문장 한 문장에 감탄하며 그 문장들이 만들어내는 시적 이미지와 소설적 내러티브에 심취해 가빠진 호흡과 떨리는 손으로 책장을 넘기기조차 아쉬웠던 매혹적인 책. 이런 적은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숨막힐듯 아름답고 푸르도록 서글픈 달빛과 그 투명한 달빛에 비친 사과향 가득한 조용한 시골마을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것만 같다.

오감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풍성한 필체를 단문만으로 해낸 마루야마 겐지. 난 어제밤 그를 처음 만났다. 그의 필체는 철저히 계산된 듯 정확하다. 글쓰기를 집짓기에 비유하는 평론가 신형철이 이 소설을 추천한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다. 그러나 정확함만으로 마루야마 겐지를 설명하기엔 부족함이 있다. 뭔가 더 필요하다. 아마도 그것은 아름다움이 아닐까. 치명적이고 매혹적인 아름다움.

정확하고 아름다운 필체가 만들어낸 시 같은 소설, 소설 같은 시. 이 책 ‘달에 울다’는 이름도 밝히지 않는 한 남자의 독백이다. 사과나무 밭을 일구며 평생 시골마을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는 한 남자의 애잔한 이야기다.

그가 자는 방엔 병풍이 하나 놓여있다. 사계절이 그려진 묵화다. 그 묵화는 하늘과 달을 품고 있으며 물과 바람도 담고 있다. 계절에 따라 바뀌는 자연에 거스르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남자도 있는데, 그는 법사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흠집 많은 비파를 켜며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 법사다. 그는 주인공의 분신이기도 하고, 주인공이 사랑했던 유일한 여자 야에코이기도 하며, 때론 아버지, 때론 촌장이기도 하다. 법사는 주인공의 상상 속에 살며 그와 함께 늙어간다. 주인공은 평생 그 조그만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고 사과나무를 일구며 단조로운 삶을 살아갔지만, 법사는 병풍 안에서 유유히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닌다. 법사는 주인공 내면을 반영하기도 하며 그것을 충족시켜주기도 하는 매개물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다. 아마도 주인공에겐 유일한 평생지기 친구였을 것이다.

‘달에 울다’는 마루야마 겐지의 필체 그 자체다.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으며 충만함을 유지하며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절제된 방식으로 조용히 지속해서 내뿜는 그의 글쓰기. 그를 만난 것은 나로선 굉장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배우고 닮고 싶은 글. 베껴 쓰고 싶은 글. 아, 언젠가 소설을 쓴다면 마루야마 겐지의 필체를 넘어서는 필체를 구사하고 싶다.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한 권의 책을 읽은 게 아니다. 한 편의 아름다운 작품을 감상한 것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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