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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이 상식이 되길.
강남순 저, '안녕, 내 이름은 페미니즘이야'를 읽고.
저자로부터 선물까지 받았지만 아이들 책이라는 이유만으로 책장 한 구석에 꽂힌 채 여러 달 외면 받던 책이다. 며칠 전 이 책이 2019년 세종도서로 선정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접했다. 그날 집에 오자마자 이 책을 꺼내 읽었다. 오래 꽂혀있던 책을 꺼낼 때는 언제나 약간의 죄책감이 든다. 이 책을 꺼낼 때도 그랬다. 다 읽고 나서는 왜 더 일찍 읽지 않았나 후회까지 되었다. 페미니즘에 대한 요점 정리가 어린 아이도 이해하기 쉽게 너무 잘 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목이 곧은 한국의 가부장적인 기성 세대들이 만약 이 책에 나온 정도의 상식만이라도 숙지하고 있었다면, 2017년 '세계 젠더 격차 보고서'에서 세계 144개국 중 118위를 차지했던 수치는 적어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우리의 어린 딸 아들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이러한 '쉬운 상식'도 모르는 (혹은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국민 수준은 곧 철옹성과도 같은 한국의 고질적인 병폐를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지표일 것이다.
하지만 부끄러워하고 있기만 하면 안 된다. 행여 그 부끄러움을 덮으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건 인정해야만 하는 엄연한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우린 너무 모른다. 그 따위 것들은 몰라도 된다고 믿어왔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약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별 탈이 없었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졌고 이제서야 우리들이 서있던 곳이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으며 성차별을 비롯한 모든 차별의 피해가 어떠한지를 알게 되었다. 우리가 어릴 적부터 자라오면서 무의식적으로 쓰고 있던 안경이 곧 차별의 안경이었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고 부족한 것들은 배우며 나아갈 때 미래의 희망이 가능할 것이다.
마지막 페이지 숫자는 172 이지만, 큰 글자에 그림도 많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고 일반 성인 도서로 환산하면 이 책은 100 페이지도 되지 않는 가벼운 분량의 책이다. 그러나 분량과 내용이 비례하는 건 아니다. 허투루 버릴 페이지가 없을 정도로 구성이 잘 되어 있다. 그림조차 글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준다.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들에게 있어 페미니즘에 대한 첫 책으로 이 책은 손색이 없다. 요즘엔 그 정도 나이의 아이들도 알 건 다 알잖은가. 나도 기회가 되면 아들에게 이 책을 읽어줄 참이다.
이 책은 총 9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페미니즘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부터 짚기 시작해서 페미니스트가 누구인지, 여성의 권리 운동이 무엇인지, 차별의 두 얼굴이 어떤 것들인지, 미투 운동이 무엇인지, 여성 험오는 무엇이고 왜 일어나는 것인지, '젠더'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양성평등과 성평등의 차이가 무엇인지, 여자와 남자는 왜 달라야 하는지에 이르기까지 강남순 선생님이 초등학생인 나미와 재원이에게 친절한 대화체로 조곤조곤 알려주는 형식이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의 자녀가 있는 중년 남성이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미와 재원이의 옆자리에 앉은 어린이가 된 심정으로 선생님의 설명에 경청했다. 다른 페미니즘 관련 책 몇 권을 읽어서인지 대부분 아는 내용이었지만, 이런 반복은 늘 새롭다. 여전히 나도 모르게 내 안에 깊숙이 각인된 가부장적인 인식론이 뿌리 뽑히려면 이 정도의 반복은 즐거움이다.
(1) 페미니즘은 여자만을 위한 게 아니다. 시작은 여자와 남자의 평등한 삶에 대한 고민에서였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성을 넘어서 모든 차별과 편견에 대한 문제들에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페미니즘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아야만 하는 상식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서로 다른 우리들과 그들을 차별, 배제, 혐오하지 않고 존중과 배려를 하며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2) 그러므로 페미니스트는 여자만이 아니다. 페미니스트가 되는 데 성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
(3) 여자나 노예에게 투표권이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믿음이 당연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충격적인 사실은 미국만 해도 여자들이 투표권을 가지게 된 것은 불과 100년 전인 1920년이라는 점이다. 생물학적인 차이가 인간의 우열을 결코 확정 지을 수 없다.
(4) 이 세상에 서로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가 다르다. 차이를 가진다. 그 차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등급을 매겨 구별하는 것을 차별이라고 한다.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같은 일을 해도 월급을 적게 받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차별도 존재하지만, 마치 여자와 남자에게 직업 종류가 정해져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여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도 존재한다. 우린 이런 차별적인 요소들을 하나씩 깨달아가면서 차별을 넘어서야 할 것이다. 점진적이지만 꾸준한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5) 미투 운동은 '너만 그런 게 아니야. 나도 당했어. 그리고 그런 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불의하고 부당한 차별을 당해온 사람들이 당당히 자신들의 무죄를 입증하고 정당한 피해보상을 받으며 다시는 똑같은 피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깨어있자는 운동이다. 비단 성폭력에 대한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차별의 피해자들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기는 힘들겠지만, 이런 운동에 귀를 기울이며 '나도 너와 함께야'라는 메시지로 마음을 모은다면 보다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적어도 그러한 공감과 도움은 우리가 줄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이런저런 이유로 침묵을 지켜온 차별의 피해자들이 모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분위기를 꿈꿔본다. 그리고 앞으로 차별을 당하게 될 땐, 침묵하지 않고 곧바로 목소리를 내어 즉시 피해자에게는 자유와 해방과 보상을, 가해자에게는 적절한 죄값을 물어 정의가 실현될 수 있길 기대해본다.
(6) 여자들은 열등하기 때문에 혐오 대상이 되어도 된다고 믿었던 역사가, 믿기지 않겠지만, 실제 우리 인간의 역사다. 중세 유럽에서는 마녀 화형 사건이 실재했다. 그리고 그 여자들을 마녀로 지목하고 죽인 자들은 모두 권력을 가진 남자들이었다. 뿐만 아니다. 우리 안에 내재된 여성 혐오는 군데군데 잡초처럼 산재되어 있다. '여자가 뭘 안다고 그래?' 하는 질문이 들 때가 있다면, 그것은 당신도 여성 혐오의 가담자라고 봐야 한다. 이런 고질적인 편견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길 소망한다.
(7) Sex는 여자와 남자의 생물학적인 구분인 반면, Gender는 여성과 남성의 사회학적 구분이다. 생물학적으로 여자는 태어나기 전부터 엄마 뱃속에서 정해지지만, 사회학적인 여성은 그렇지 않다. 드 보부아르가 '제 2의 성'에서 썼듯이 '여성은 만들어진다.' 우리 사회엔 트랜스젠더도 엄연히 존재하며 그들도 인간이다. 평등한 인간. 생물학적인 차이만으로 사람을 규정짓거나, 나와 다른 젠더를 혐오하거나 악마화시키는 일은 사라져야 할 것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8) 언뜻 좋은 말처럼 들리는 '양성평등'이라는 말 자체에는 간성이나 트랜스젠더가 배제되어 있다. '양성평등'이 아닌 '성평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모든 성이 차별 없이 평등함을 말하자.
(9) 서로 다른 것을 존중하고 배려할 수도 있지만 차별하고 혐오할 수도 있다. 우린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 집단적인 차원에서도 이 점을 생각해야 한다. 권력과 자본의 영향은 후자를 언제나 선호하기 때문이다. 여자다운 것이나 남자다운 것을 규정하고 타자를 그 안에 가두어 바라보는 것을 '젠더 렌즈'라고 한다. 앞서 말했다시피 여성다움이란 결코 생물학적인 차이에서 모두 비롯되는 게 아니다. 차별과 편견의 '젠더 렌즈'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젠더 렌즈'뿐만이 아니다. '인종 렌즈', '계층 렌즈', '나이 렌즈', '장애 렌즈' 등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착용하고 있는 차별의 관점을 하나씩 인지하고 고쳐나가야 한다.
페미니즘이 단순히 그 동안 억압 받았던 여성들이 이제서야 자신들의 이익을 되찾고자 하는 운동 따위로 폄하해서 보는 잘못된 선입견과 편견이 깨어지는 그날을 꿈꾼다. 우리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어 페미니스트라는 단어 자체가 사라지는 그날을 꿈꾼다. 차이가 차별이 아닌 존중과 배려로 거듭나는 그날을 꿈꾼다. 우리 모든 인간은 평등하니까.
강남순 읽기
1. 용서에 대하여: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397245280320250
2. 페미니즘과 기독교: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1915133151864791
3. 배움에 관하여: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52524668125635
4. 정의를 위하여: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420175528027215
5. 매니큐어 하는 남자: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570770352967731
6. 젠더와 종교: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81229218588509
7. 안녕, 내 이름은 페미니즘이야: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8168086894622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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