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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A. J. 크로닌 저, '성채'를 읽고

가난한선비/과학자 2020. 1. 3. 09:14

THE CITADEL: 거대하고 견고한 구조적 악의 실체.

A. J. 크로닌 저, '성채'를 읽고.

이미 고전이 된 이 책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세세한 줄거리를 파악하거나 상투적인 교훈 따위를 끄집어내는 것은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대신, 제목이 가진 의미를 곰곰이 따져 물으며 책 전체에 깔려 있는 저자의 메시지와 이 책이 쓰인 시대적 상황을 파악하는 편이 더 나은 방법일 것이다.

작은 글씨로 빼곡히 400 페이지를 메우고 있는 이 책에서 '성채'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본문은 단 세 군데다. 다음과 같다.

1. "...자네는 바빌론의 성채를 때려부수려는 거지. 나에게도 젊은 시절은 있었다네."
2.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인생이란 미지의 것에 대한 공격이며 격렬한 돌격전이라고 곧잘 말씀하시던 것 말이에요. 정상에 있는 것만을 생각하면서,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성채를 한사코 점령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당신은 그런 기백을 가지셨어요."
3. "이윽고 그가 발길을 돌려 시간에 늦지 않도록 급히 나가려 할 때 보니, 눈 앞의 하늘에서 성채의 흉벽 모양의 구름이 뭉글뭉글 밝게 떠올라 있었다."

성채. 영어로는 Citadel. Wikipedia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A citadel is the core fortified area of a town or city. It may be a castle, fortress, or fortified center." 즉, 우리가 디즈니 영화 앞부분에서 보는 것처럼, 아름다운 공주나 멋진 왕자가 살고, 하늘 위로 불꽃놀이가 펼쳐지며, 뾰족하고 높은 첨탑을 가진 '성 (castle)'과는 사뭇 다른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낭만적인 상상보다는 오히려 현실적인 측면, 즉 방어를 위한 군사적 목적을 떠올려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의 원제도 'The Castle'이 아닌 'THE CITADEL'이다. '성채'보다는 '요새' 정도로 해석하는 편이, 비록 문학적 뉘앙스는 조금 떨어질지 모르나, 제목을 이해하기에는 좀 더 적절한 것 같다. 이를 조금 더 풀어서, '어떤 거대하고 견고한 벽 같은 존재', 혹은 '도저히 한 사람이나 소수의 힘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는 거대한 구조적 실체' 정도로 이해한다면, 적어도 이 책이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 앤드루 맨슨은 의사다. 저자인 A. J. 크로닌도 이 책을 쓰기 전 의사였다. 앤드루는 크로닌의 분신인 셈이다. 이는 이 책이 크로닌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그리고 이를 제목과 연결시켜 이해해본다면, '성채'는 아무래도 일반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의사의 눈에 비쳐진 '의사 사회의 구조적 악' 정도의 좁은 의미로 해석하는 편이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엔 훨씬 더 도움이 된다. 저자가 앤드루를 의사 자격을 갓 취득한 신참내기 의사로 등장시킨 이유 역시 '성채'의 거대함과 견고함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장치라고 해석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그 당시 영국 의사 사회 내부의 보이지 않은 폐단을 고발하는 메시지를 과감하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앤드루는 성인이 되기 전 부모를 잃었다. 하지만 운 좋게, 빈곤하고 유망한 장학생에게만 지급되는 장학금을 (비록 의사 자격 취득 후 성실히 반환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는 장학금이었지만) 받으며 의대까지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다혈질의 스코틀랜드 남성인 그에게는 여전히 의사로서 순수하고 선한 동기가 살아있었으며, 한 인간으로서의 양심과 정의감도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한 번도 때를 묻혀보지 않은 백지와도 같이 나이브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백지는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점점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장학금을 갚아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에 그는 남 웨일스의 벽촌, 블레넬리까지 일부러 찾아왔다. 의사 자격증을 딴 지 얼마 안 되는 조수로서는 최고의 보수를 받을 수 있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공식적인 의사로서 일을 시작하게 된 첫 도시, 블레넬리에서부터 앤드루는 '성채'의 그림자랄까, 꼬리랄까, 아무튼 혼자의 힘으로, 혹은 순수한 의사의 동기만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구조적 폐단을 인지하게 된다. 하지만 블레넬리는 탄광 도시이자 벽촌 중 벽촌이었기에, 그가 느낀 성채는 시골 마을이면 의례히 가지는 보수성과 빈약한 시스템 정도로 충분히 해석할 여지가 있었다. 저자는 앤드루의 첫 직장을 블레넬리에 위치하게 했고, 마지막 직장을 런던 중심에 부유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에 위치하게 했는데, 이러한 순서는 앤드루가 블레넬리에서 인지한 '성채'가 시골만의 문제가 아닌 가장 번화하고 발달된 도시 한복판에서의 문제와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성채'의 규모는 문명의 발달이나 사람들의 경제와 지식 수준에 따라 차이가 날지는 모르나, 그 속성과 본질은 동일하다는 것이 작가 크로닌이 말하고 싶었던 중요한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자고로 악의 본질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앤드루의 두 번째 직장은 애버라로라는 고장이었다. 여전히 시골 마을이었지만, 블레넬리보다는 규모가 크고 거주 인구도 많고 좀 더 번화한 곳이었다. 이곳에서도 앤드루는 또 다른 규모와 색깔의 '성채'와 맞닥뜨린다. 블레넬리와 애버라로에서 그가 공통적으로 대면한 '성채'의 속성은 돈과 권력이었다. 블레넬리에서 애버라로로 옮기게 된 이유도 앤드루의 금전적인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한편, 애버라로에서는 돈 뿐만이 아닌 학위, 즉 명예의 힘을 인지하게 된다. 덕분에 그는 산골에 처박힌 시골 의사 직으로부터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영국 의학회 회원증을 따낼 수 있었고, 블레넬리에서부터 순수한 동기로 심혈을 기울여 연구해 온 진애흡입에 관한 논문으로 의학박사 학위까지 따낼 수 있었다. '성채'의 진화는 그가 가졌던 백지의 진화도 유도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자고로 한 사람이 타락하기 직전의 위치는 일반적으로 높은 곳인데, 그 높은 곳에 아직은 기름칠이 덜 되어 있어서 미끄러지기 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이 미끄러워지기 위해선 불의와 위선과의 타협이라는 단계를 거쳐야만 했다. 저자 크로닌은 단계적으로 앤드루를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유인하고, 그 높은 곳을 스스로 기름칠하게 만들어 미끄러져 넘어지도록 작업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일터는 런던에 위치했다. 그의 박사 논문 덕에 정부의 전담 의무관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제 인맥까지 갖추기 시작했고, 지위는 물론 어느 정도 경제까지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도 '성채'는 존재하고 있었다. 앤드루는 그곳에서 정부 관료 사회에 고여있던 폐단을 마주한다. 그리하여 표면상으로는 지극히 안정적으로 보이는 자리를 마다하고, 용기 내어 런던의 허름한 변두리 지역에서 개업을 한다. 그리고 그의 오랜 친구 햄프턴과의 만남이 재기된다. 햄프턴은 이미 닳고 닳은 불의한 의사 사회에 우뚝 서 있는 성채에서 대활약을 하며 배를 불리고 있는 인간이었다. 소설 속에서 끝까지 선과 정의의 편에 서서 앤드루를 사랑하고 응원해 마지 않던 천사 같은 아내 크리스틴이 가장 못마땅해 하고 경계했던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축복 뿐만이 아닌 재앙도 언제나 어떤 만남으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앤드루는 자신이 증오하고 기피했던 관료사회의 부패함, 즉 돈과 명예로 권력을 사들이고 불의한 일에 연루된 비슷한 사람들끼리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안전지대를 만들어 은밀히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부류 속으로 점점 물들어갔고, 그 열매로 그는 점점 성공가도를 달린다. 반면, 아내 크리스틴과의 관계는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다. 변해가는 남편의 모습에 아내는 적잖은 실망을 하면서도 끝까지 그를 사랑하고 믿어주었다. 아마도 아내마저 없었다면 앤드루는 파멸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아내의 기도가 이뤄진 것이었을까. 어느 날, 앤드루는 그가 스스로 선택한 불의의 현장에서 무고한 지인의 죽음을 방관하게 된다. 충분히 살 수 있는 환자였는데, 어처구니 없는 돌팔이 친구 외과의사의 짓으로 단 10분 만에 죽어버린 것이었다. 이 사건은 드디어 앤드루에게 양심에 가책을 가해왔다. 아니, 그건 벌써부터 왔었지만, 자신이 살인에 버금가는 짓을 저질렀다고 여겨지자 그는 그제서야 '제자리'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게 된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회심'은 곧장 아내 크리스틴에게로 돌아가는 길과도 같았다. 크리스틴은 기뻐했다. 그리고 그를 두 팔 벌려 맞아주었다. 둘은 물질적인 행복이 가져다 주는 족쇄로부터 비로소 해방 받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소설이 이렇게 끝나버리면 너무 소설 같은 법. 저자는 아내 크리스틴을 죽음으로 내몬다. 아마도 앤드루에게 죄값을 치르는 과정을 의도적으로 넣고자 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이 책엔 가톨릭 신앙이 녹아있다). 남편이 회심하여 집으로 돌아온 날, 기쁨에 못 이겨 허기진 남편을 위해 일부러 남편이 좋아하는 치즈를 사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비극이었다. 들것에 실려온 아내 크리스틴의 왼쪽 손가락에는 여전히 그가 좋아하는 치즈가 담긴 조그만 보퉁이의 끈이 휘감겨 있었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길이 이렇게도 커다란 희생을 치러야만 했던 것이었을까. 앤드루는 완전히 얻어 맞은 것처럼 한동안 실성한 듯한 상태가 된다.

소설에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메시지는 '성채'에 대한 고발이다. 작게는 그 당시 영국 의료 사회의 부패함을 적발하고 고발하는 것이겠고, 크게는 일반적인 구조적 악에 대한 고발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구조적 악의 핵심은 돈으로 산 권력이다. 이는 이 책이 첫 출판된 1937년 당시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성채'는 시간이 갈수록 고도로 진화를 거듭했다. 82년이 지난 2019년에 이 책을 처음 읽은 나는 오히려 거의 백 년 전에도 그렇게나 거대하고 견고한 구조적 악이 존재했음에 입을 쩍 벌릴 뿐이다.

한 인간의 백지와도 같은 순수함이 타락되어가는 과정, 그리고 회심으로 구원에 이르는 여정이 이 책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다. 누군가는 이 책을 읽고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의 상투적인 교훈 따위로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내 눈에는 작가 크로닌의 서사와 묘사의 전개 방식과 어떻게 핵심 메시지를 이야기 안으로 자연스레 스며들게 하는지를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 책을 소개해준 니콜 님에게 감사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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