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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쑥 드러나버린 경계 앞에서.
거의 하루 종일 집에만 있는데다, 이제 열 한살이 된 아이의 학업 뿐만이 아니라 무료함까지도 신경 써야만 하고, 매 끼니를 고려해야만 하고, 이젠 아내까지 집에 있다보니 혼자 있는 시간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집이 저택이라도 된다면 일하는 방, 노는 방, 먹는 방, 따로따로 구분지어 각 방에서 일정 시간을 방해받지 않고 하루를 규칙적으로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정작 나의 하루는 딱히 뭔가를 시작하고 마치고 할 것 없이 시간만 흘러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일하는 것도 아니요, 노는 것도 아니요, 양육하는 것도 아니요, 쉬는 것도 아니다. 온종일 어정쩡한 기분으로 어딘가에 묶여 있고 갇혀 있는 것만 같다.
그래도 난 아직까진 재택근무라는 그럴싸한 명분으로 집에서 이런 비효율적인 일과를 보내도 동일한 월급을 받고 있다. 감사한 일이지만 또 한편으론 마음이 무겁다. 특혜는 언제나 누군가에겐 차별과 열등감을 가져다주는 법이다.
현재 나에게 주어진 이런 특혜도 이번 코로나 사태가 장기간이 되면 그 누구도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벌써 나보다 낮은 직급에 있는 사람들은 4월이 지나면 월급을 전부가 아닌 부분으로 받던지 아예 못 받게 된다는 말이 나왔다. 갑자기 이번 사태로 인해 월급 줄이 끊긴 모든 분들에게 위로를 전한다. 불쑥 드러나버린,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기득권의 경계 때문에 마음이 안 좋을 모든 분들에게 죄송한 마음이다. 솔직히 재택근무한다고, 그게 힘겹고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다고 하소연하는 것도 이분들 앞에선 사치일 것이다. 돈줄이 보장된 사람들의 고민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고민은 그 깊이부터가 다를 것이다. 조금만 그들을 더 생각하고 불평불만을 토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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