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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
성숙함은 깨달음에 있지 않고 깨달음 이후 아직 깨닫지 못한 타자를 대하는 태도에 있다. 스스로 깨달았다 떠드는 사람은 많으나, 그 깨달음의 가치를 지켜내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다. 깨닫고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이유 역시 깨달음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았다 하는 사람의 미성숙한 태도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이런 비일비재한 상황은 자연스레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낳기에 이른다. “과연 그 사람은 깨달은 게 맞는가? 도대체 뭘 깨달았다는 말인가?”
보이는가? 아무도 ‘무엇을’ 깨달았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깨달았다 말하는, 그러나 미성숙한 태도를 지닌 사람들 덕분에 사람들의 관심은 더 이상 깨달음의 내용에 머물지 않는다. 그나마 사람들에게 가느다란 촛불처럼 남아있던 관심도 후 불어서 꺼뜨리는 격이다.
어떤 깨달음도 그것을 체화시키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체화시키지 못한 깨달음을 머금고 있는 자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게 만드는 방해꾼 혹은 장애물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이는 나이가 든다 해도 마찬가지다.
나이 든다고 해서 사람들이 자연스레 지혜로워지진 않는다. 대부분은 오히려 깨닫지도 못했으면서도 마치 깨달은 것처럼 흉내내는 기술을 잘 연마했다든지, 깨달았지만 그것을 살아내지 못해서 여전히 중간상태에서 갈등하며 눈치나 보고 있는 늙은이가 될 뿐이다. 타자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기보단 자신의 사소한 자존심을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아이처럼 투정부리거나, 오히려 어린아이보다 더 쉽게 상처 받고 삐지는 등 구제불능이 될 뿐이다.
자칭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다고 자신하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깨달음과 실천에는 나름 단계가 있어서 그것이 또 하나의 위계질서를 만드는 것을 본다. 1단계 실천을 하고 있는 자는 0단계에 머문 자를 힐난하고, 2단계에 진입한 사람들은 1단계에 머문 사람들을 가짜라고 손가락질한다. 적어도 모두 0단계에 있을 땐 이런 분쟁은 없었다. 과연 깨달음이 가져다준 유익이란 어떤 것일까. 저 사람보다 난 더 알고 있다는 자기만족? 난 적어도 이것을 이런 행동으로 보이고 있어! 하는 자기자랑?
난 잘 모르겠다. 깨달았다고 떠벌리면서 오히려 더 자기도취에 빠지는 사람들, 오히려 더 교만하게 보이는 사람들. 내용만 중요한 게 아니다. 형식도 중요하다. 내용에 만드는 형식. 형식이 담고 돋보이게 하는 내용. 나이가 들면서 난 이제 점점 형식도 보게 된다. 진정성이 있는 그릇이 난 좋다. 거기엔 좋은 내용도 담을 수 있고 타자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를 담기에도 벅차서 삐져나온 게 교만이다. 좀 더 성숙해지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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