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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고.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 고랸치꼬프. 귀족 출신인 그는 자기 부인을 살해한 죄로 서부 시베리아 옴스끄 지방에 위치한 감옥에서 10년 간의 형기를 무사히 마치고, K시 이주민으로 정착하여 겸허하고 조용한 일생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과묵함을 넘어 대인기피증까지 있는 듯 사람들과의 접촉을 의도적으로 피하며 살고 있었다. 이른바 은둔형 외톨이 타입. 원래부터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유형 생활이 혹시라도 그에게 남겼을지 모르는 어떤 트라우마 탓이었을까. 그는 죽을 때조차 고독 속에서 홀로 죽었다. 그의 단절된 삶은 결국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 10년 간 강제로 빼앗겼던 자유를 마침내 되찾았건만, 그는 왜 마치 여전히 자유를 빼앗긴 사람처럼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립된 삶을 이어갔던 것일까. 과연 그에게 자유란 무엇을 의미했을까. 도스토예프스키는 왜 이런 한 사람의 모순된 삶의 결말을 먼저 보여주면서 이 책을 시작했을까.

‘나’라는 사람이 서두를 여는 이 작품은 액자식 구성으로써, 서두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부분은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가 직접 쓴 생생한 유형 생활 기록이다. 그가 죽고 남긴 유품 중 두툼한 공책이 하나 있었는데, 그 공책을 가득 메운 기록들이 ‘나’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이 작품, ‘죽음의 집의 기록’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5대 장편 소설과는 달리 이 작품엔 강력한 서사가 없다. 주로 제한된 감옥 생활을 그리는 작품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는 당연할지도 모른다. 다만, 이 작품은 마치 살아있는 현실인 것처럼 감옥 안 세계를 유감없이 생생하게 보여준다. 사실적인 묘사에서 과장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직접 경험 없는 공상만으로는, 혹은 유경험자에게 귀동냥만 해서는 결코 써질 수 없는 글이 분명하다. 그렇다. 이 책 역시 비록 소설이라는 형식을 따르고는 있지만, 사실은 저자 도스토예프스키의 실제 경험이 그대로 반영된 작품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 속 주인공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인 셈이고, 그의 유형 생활 기록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화 된 수기로 볼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1850년부터 1854년까지 4년 간 유형 생활을 했다. 그는 공상적 사회주의자 푸리에를 따르는 뻬뜨라셰프스키 독서 써클에 속해 있었는데, 1849년 4월 15일 모임에서 당시 금서였던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했고, 그때 마침 그 써클 안에 잠입해있던 경찰 스파이의 밀고로 인해 써클 회원 모두가 체포된다. 황제 니콜라이 1세 체제에서 정치범으로 몰린 것이었다. 그들은 놀랍게도 모두 사형 선고를 받는다. 단지 금서 하나 낭독했다고 사형이 언도되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은, 나중에 밝혀지기로는, 정치범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자 상부에서 조작된 반인륜적인 연극에 불과했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실제 사형집행장에서 두 손과 두 발이 묶인 채 총구 앞에 서서 그야말로 죽음 직전까지 가는 극적인 경험을 해야만 했다. 물론 잘 짜여진 각본대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총살 직전 사면을 받고 감형되어 시베리아 옴스끄에서 4년 간 유형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 끔찍했던 경험은 그에게 트라우마가 되었고 그가 평생 앓은 간질병의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내게 있어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가 묘사하는 감옥 안 세계는 책상 앞 상상력의 산물이 아닌, 오히려 도스토예프스키의 오감을 통과한 생생한 삶의 현장으로 읽혔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곳은 살아있으나 죽은 자들의 세계였다. 살아있음과 죽어있음의 차이는 곧 ‘자유’의 유무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작품을 통해 감옥 유형수들의 현장을 세상에 드러내보임과 동시에 자유에 대해서 뭔가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자유. 감옥 안 자유와 감옥 밖 자유. 둘은 과연 같을까 다를까. 아니면, 같은 자유를 다른 측면에서 보는 것에 불과할까.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린 이 책을 통해 감옥 생활을 거친 사람이 다시 맞이한 감옥 밖 자유 또한 고찰해 봐야 할 것이다. 많은 독자들이 놓치고 있는 것 같은 이 부분에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돈은 주조된 자유다.” 이미 유명해진 이 문장은 이 작품 첫 번째 장에 나오는 명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에서 언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재료 중 하나인 돈과 자유에 대한 관계를 아주 짧고 간결하게 표현한 문장이다. 감옥 안에서의 사유재산은 당연히 금지되어 있다. 발각되면 즉시 빼앗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유형수들은 돈을 벌기도 모으기도 하고, 비록 적은 양이지만 마음껏 탕진하기도 한다. 나름대로의 경제 구조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유형수들은 감옥이라는 건물 안에만 갇혀 있지 않는다. 감옥은 유치장이 아니다. 새로운 삶의 터전이며 누군가에게는 죽기 전까지 살아야만 하는 모든 시공간의 베이스캠프다. 그들은 강제적으로 노동에 참여해야만 했다. 인근에 있는 건축 현장이라든지 농사 현장에 파견되어 철저한 감시 하에 나름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노동을 부여받았다. 외부 민간인들과의 접촉이 허락된 건 아니었지만, 감시라는 것 자체가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틈을 타 비밀리에 어떤 일을 청탁받고 (심지어 귀금속 세공자도 유형수 중에 있었다) 노동에 대한 댓가를 지불받는 것이었다. 물론 간수에 의해 적발되면 모든 걸 다 압수당했지만, 유형수들은 어딘가에 잘 숨겨두어 그들만의 경제 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있었다. 다음은 위에 쓴 명문이 포함된 문장이다. 뒤의 몇 문장을 추가한다.

“돈은 주조된 자유였으며, 그래서 자유를 완전히 박탕당한 사람들에게 돈은 열 배나 더 귀중한 것이었다. 만일 돈이 주머니 속에서 짤랑짤랑 소리를 내기만 해도, 비록 그것을 쓸 수는 없지만, 벌써 반 이상이나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돈은 언제 어디서나 쓸 수 있었으며, 더욱이 금단의 열매는 두 배나 달콤한 법이었다. 감옥에서도 술을 구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파이프 담배도 아주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지만 모두들 그것을 피우고 있었다. 돈과 담배는 괴혈병과 그 밖의 다른 질병으로부터 죄수들을 구해 주었다. 일도 그들을 범죄로부터 구해 주었다. 일이 없었다면, 죄수들은 유리병 속의 거미처럼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도 돈도 모두 금지되어 있었다.” (열린책들 3판 38-39페이지에서 발췌)

돈은 감옥 안에서도 힘이 있었다. 돈이 많고 적음에 따라, 비록 엉성하지만, 감옥 안에서도 나름대로의 피라미드 체계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감옥 밖에서의 신분, 이를테면 귀족인지 평민인지에 따른 출신성분 역시 감옥 안에서도 유효했다. 죄에 대한 댓가로 자유를 빼앗긴, 그래서 그 누구보다도 자유를 갈망할 수밖에 없는 유형수들에게도 돈은 여전히 자유의 상징이었다는 점이 내겐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인간이 자유함을 느낀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혹시 내가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그 돈을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권한이 곧 자유함 아닐까. 맘껏 돈 벌 수 있는 자유와 맘껏 돈 쓸 수 있는 자유 중 어느 것에서 우린 더 자유함을 느낄까. 돈이 자유에 대해 가지는 힘은 어디까지일까. 돈이 없다면 진정한 자유가 가능할 수 있을까. 이를 단순히 자본주의 시대에 국한된 문제로 치부하고 축소시키진 말자. 오히려 인간 본성에 관련된 철학적인 질문으로 발전시켜 생각해 보자. 자유란 무엇인지. 혹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타자의 반동적인 힘에 의한 만족으로부터 오는 행복에 국한된 느낌은 아닐지. 나의 자유를 위해선 누군가의 자유가 희생되어야 하는 건 아닌지. 그리고 결국 일해서 돈 벌 수 있는 자유보단 돈을 쓸 수 있는 자유에서 우린 진정한 자유함을 암묵적으로 느끼고 있진 않은지.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볼 문제일 것이다.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는 유형 생활에서 힘든 고통이 ‘자유의 박탈’과 ‘강제 노동’이라고 언급하고 있지만, 나중에 가서 깨닫게 된, 그 무엇보다 더욱 힘든 고통은 ‘강제적인 공동 생활’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혼자 있을 수 없다는 것, 24시간 누군가와 함께 해야 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파괴적인 구속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는 일상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혼자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재발견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고립되고 단절된 삶은 곧 죽음을 의미하지만, 결코 혼자 있는 시간 없이는 사회적 동물로서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혼자 있을 수 있음은 곧 가장 기본적인 자유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지휘관들이 죄수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는 인권을 말한다. 사람들이 흔히들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죄수들을 잘 먹여 주고, 잘 다루어서 모든 것을 법대로만 처리하면 만사가 끝이라고 믿는 것’이라고 일갈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가 모두, 그가 모욕을 당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본능적으로든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든지 자기의 인간적 가치에 대한 존중을 요구하는 것이다. 죄수 자신도 자기가 죄수라는 것을, 버림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간수 앞에서의 자기 위치도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낙인으로도, 어떠한 족쇄로도 그로 하여금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 수는 없다. 실제로 그는 인간이므로, 결국 그를 인간적으로 대하지 않을 수 없다.” (열린책들 3판, 177페이지에서 발췌)

그렇다. 어떤 죄를 짓고 그 댓가를 지불하기 위해 자유를 빼앗긴 채 감옥에서 살아야 한다고 해도 그 죄수는 여전히 인간이다. 그러나 죄를 지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도덕적 가치를 부여한 뒤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거나 혐오하게 된다면, 그 행위야말로 더 큰 죄를 짓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죄수는 감옥 생활로써 이미 그 댓가를 지불하고 있다. 이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말에서의 ‘모든’은 감옥에 갇힌 죄수도 포함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우리와 함께 숨쉬고 있는 여러 소수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유가 빼앗긴 감옥에서 얻은 이 깊은 인간 존중에 대한 깨달음. 지은 죄와 상관없이 인간은 인간이다. 이를 간과한다면 인간의 기본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며, 중죄를 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400 페이지 남짓한 분량의 이 작품은 위에서 언급한 사건과 주제 이외에도 많은 사실적인 유형수들의 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는 그의 첫 1년과 마지막 1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썼다. 특히 마지막 1년은 그 동안의 감옥 생활보다도 많은 혜택을 누렸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의 떠남을 아쉬워하고 축하해주기도 했다고 기록했다. 여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의 26개월의 군생활에서 마지막 몇 달 동안 느꼈던 그 후련섭섭한 마음과 조금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는 마지막 페이지에 와서 다음과 같은 하소연을 한다. 

“이 벽 속에 얼마나 많은 젊음이 헛되이 매장되었으며, 여기에 얼마나 위대한 힘들이 덧없이 파멸해 버렸는가! 이제는 모든 것을 말해야만 한다. 실로 이 사람들은 비범한 인물들이었다. 어쩌면 이곳에 세상에서 가장 힘 있고 가장 유능한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력한 힘들이 덧없이 파멸해 갔다. 그것도 변칙적이고 불법적이며 되돌릴 수 없이 파멸해 갔다. 하지만 누구의 죄란 말인가? 정말로 누구의 죄인가?” (열린책들 3판 431-432페이지에서 발췌)

유형수들은 비록 법적인 절차를 거쳐서 각자가 지은 죄의 댓가를 치르기 위해 감옥에 모였지만, 과연 이 감옥 생활이 그들에게 적절한 조치였을까. 과연 그 조치로 인해 사회는 더 안전해지거나 나아졌을까. 혹시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가 외친대로, 오히려 사회에 필요한 사람들을 잃게 된 면도 많지 않을까. 그들을 감옥에 가둠으로써 얻은 것보다 잃은 게 혹시 더 많진 않을까. 감옥이란 도구를 이용하여 죄의 댓가로 자유를 빼앗는 행위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많은 질문들이 쏟아지지만, 일괄적인 대답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 다를 것이 분명하고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가 어찌 객관적일 수 있겠는가. 다만, 나는 이 작품을 다 읽고 다시 서두를 들춰보며, 절망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서두에서 ‘나’에 의해 기록된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의 고립되고 단절된 삶, 그리고 그의 외로운 죽음은 이 숱한 질문들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암묵적인 답이자 그 제도에 대한 고발이 아닐까. 죄의 댓가는 과연 자유의 박탈로 상쇄될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유행 생활 후의 삶이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의 외롭고 단절된 삶으로 수렴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하고 있진 않았을까. 비록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미래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말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3. 악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71867029524729
4. 미성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1541264223971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36636616381098

6. 죽음의 집의 기록: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311510975560328

7. 가난한 사람들: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633890636655692

8.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72627856115307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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