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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비판

가난한선비/과학자 2020. 7. 25. 16:50

비판.


대가라고 불리는 지성인들의 사상과 그 안에 담긴 여러 개념들을 대중이 알기 쉽게 풀어서 전달하는 분들에게 우선 나는 감사한 마음을 가진다. 이런 분들이 없었다면 나는 과학은 물론이며 철학 신학 문학 인문학 사회학 등에 대한 지금의 미천한 관심조차 기울이지 못했을 수도 있다.


물론 이런 분들이 어려운 개념을 풀어주시는 글에서조차 그 분야에 문외한인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난해하기만 한 일차 자료를 해제하는 많은 이차 자료들도 아직 나에겐 버겁기만 하다. 그러나 나는 그분들을 잘난척한다고 조롱하거나 비난할 마음은 전혀 없다. 혹시라도 만약 그분들이 자신의 똑똑함과 지식 많음을 자랑하는 목적으로 그 어려운 일차 자료를 내세웠던 거라면, 나 역시 그건 자기과시 혹은 경도된 우월감 정도로 표현할 수 있으리라 본다. 어떤 학문을 깊게 파더라도 그 끝에 자기 객관화 내지는 자기 부정이라는 겸손함이 아닌, 학문을 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내재된 자기과시 혹은 자기애로 여전히 충만하다면, 그 사람은 학문을 더럽혔다거나, 차라리 학문을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나는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했다시피 이런 상황은 글의 목적이 전달이 아닌 자기과시여야만 한다. 시쳇말로 자기 자랑하고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려는 목적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나는 이차 자료라고 부를 수 있는,  일차 자료를 풀어주는 여러 컬럼이나 짧은 기고문 등에서 일차 자료의 어려운 개념이나 저자 이름을 꼭 적는 이유가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아니, 대부분의 경우는 그 사상과 개념의 출발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 혹시 독자들이 오해할 수 있을까봐, 일부러 어려워 보일 수도 있고 괜한 소리를 들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꼭 언급했으리라 생각한다. 즉, 우월감 과시가 아니라 오히려 겸손함이 묻어나는 부분일 가능성이 많다고 나는 해석한다.


우월감의 과시인지 겸손함의 표현인지는 대가들의 이름이나 사상, 개념을 언급한 문장이 아니라, 그 문장이 담긴 글의 맥락과 전체 글에 흐르는 글쓴이의 자세를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오프라인에서의 실제 삶을 참고한다면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런 글을 후자가 아닌 전자로 읽고 마치 더욱 커다란 담론을 혼자 먼저 발견한 현자처럼 굴며 비난을 일삼는 독자의 마음에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억눌린 자기애와 자기과시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나 역시 기초생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로 밥 벌어먹고 산다. 이 일을 한 지 20년이 다 되어간다. 내가 연구하는 미세하고 전문적인 영역을 옆집 할머니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게 설명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것도 만약 제한된 단어 수의 짧은 글에서 해결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고,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많은 것들을 놓칠 수밖에 없는 기로에 서게 된다. 이를테면, A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선 B 개념을 알아야 하고, B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선 또 C 개념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등 연쇄적인 난관에 봉착하게 되는 일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글자 제한이 있는 짧은 글에선 옆집 할머니가 도무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마치 독자에겐 잘만 척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길 수도 있는, 단어 사용과 개념 설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때 그 선택은 결코 자기자랑으로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유경험자가 이런 글을 대하며 비난만 일삼는다면 나로선 조금 이해하기가 어렵다. 문제가 있다고 본다. 윗대가리에 상처를 입히거나 꺾어 눌러서 오히려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과연 누가 더 거만한가 하는 위험한 생각도 해본다.


물론 일차 자료의 저자 이름이나 사상과 개념을 언급하지 않고 글을 쓴다면 더 간결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글의 요지를 더욱 분명하게 전달해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일차 자료를 공부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입장에선, 도저히 학문을 한 사람의 양심으로는 절대 그것을 자기의 사상과 개념처럼 말할 수 없다. 그건 도둑질이기 때문이다. 간결한 전달 이전에 범죄가 행해지는 셈이며 거짓과 위선이 바탕이 된 정보는 컨텍스트를 개무시한 채 텍스트의 내용만을 중요하게 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글은 전달만이 목적이 아니다. 그보다 먼저 글쓴이의 양심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 물론 전달이 중요하다. 그러나 전달할 목적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작정한다면 학자로서의 양심을 저버려야 할 때도 있을 테고, 무엇보다 전체 메시지가 잘못 전달될 우려가 크다. 텍스트의 전달도 중요하지만 글을 통해 그 텍스트가 가진 역사성과 함의도 함께 전달이 되어야 제대로 된 전달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수사라고 치부하기 이전에 그렇게 치부하고자 하는 마음에 무엇이 담겨있는지 점검하면 좋겠다. 세상엔 불필요한 수사를 동원하여 자신의 우월감을 은근히 자랑하는 이들도 많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이를 그렇게 규정하고 매도한다면 그건 그야말로 폭력이며, 그 폭력은 곧 교만함에 다름 아니라고 본다. 


글과 삶이 가능한 일치를 지향하고 겸손하게 그렇게 살아내려고 노력하는 모습. 그리고 객관적으로 타자에게 비친 모습 또한 어떤 하나의 글에 대한 다층적인 해석에 좀 더 정확도와 풍미를 가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글로만 센 척하는 이들의 비겁함은 그 글이 아무리 예리한 칼날처럼 세태를 분석하고 해결안을 제시한다 해도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일은 거의 없으리라 믿는다. 세상에 천재가 없어 이 지경에 온 게 아니다. 천재들의 고질적인 약점이 어쩌면 그 천재의 기발한 아이디어보다도 더 커다란 영향을 인류에 미쳤을지도 모른다. 지식보다는 사람다움 (단, 흔히 아는 사람다움의 의미가 아닌 어제 남긴 감상문의 출처, 김현경이 정의한 사람다움이다. 즉 개인의 성품, 도덕성, 영성 이전에 타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우선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단어임을 인지할 것) 이 먼저다. 비판을 하려면 비판을 하자. 타자를 죽이는 비난이 아닌 타자를 살리는 비판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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