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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읽기: 갈증보단 충만함을.
고전문학을 읽는 맛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순간은 풍경 묘사를 읽을 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거나 기묘한 운명의 장난으로 이뤄지는 숨 가쁜 사건 전개가 이야기를 주도하는 방식, 즉 서사 위주의 방식이 현대소설에서 주로 다뤄진다면, 고전문학에서는 자연을 비롯한 풍경이나 상황, 그 가운데 함께 하는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가 빼놓을 수 없는 주축으로 사용된다. 특별하고 자극적인 사건들로 구성된 서사에 의존하기보다는 바쁘고 정신없는 현대인들에겐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서정적인 묘사가 고전문학에선 많이 사용되는 것이다.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이나 그 인물이 속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섬세한 묘사는 소설의 단순한 부수적 요소가 아니다. 때론 먼 훗날 그 책을 기억할 때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잔상이 된다. 줄거리나 등장인물의 이름은 잊어도 풍경은 남는다. 내가 고전문학 읽기를 멈출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줄거리는 더 이상 내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지 않는다. 어차피 몇 달 후면 잊어버릴 테고, 기억한다고 해도 이젠 거기서 별 의미를 찾지 못한다. 숨 가쁜 전개에 이끌려 책장이 저절로 넘어가는 추리소설 같은 류의 책도 종종 삶에 큰 재미와 의미를 갖다 주지만, 다분히 말초적인 즐거움에 머물게 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 책은 또 읽고 싶은 갈증을 남긴다. 그러나 잔잔하고 정적인 자연에 대한 묘사, 그와 어우러진 인물의 심리 묘사가 풍성하게 담긴 책은 읽어나갈 땐 속도가 현저히 떨어지지만, 읽고 나면 내 마음은 얄팍한 갈증이 아닌 깊고 묵직한 충만함으로 채워진다. 영감을 많이 얻는 순간도 전자보다는 후자에서 압도적으로 많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자연스럽게 점점 더 전자보다는 후자로 내 취향이 길들여져 가는 것 같다. 속도는 더디지만 책 한 권과 좀 더 깊은 소통을 한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나는 이런 즐거움이 참 맛있다. 무언가 채워지는 기분이 좋다. 구상하고 있는 소설이나 책을 써나가는 데에 있어서도 가장 큰 영감의 통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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