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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과 ‘평범’의 비린내 나는 실체.
손원평 저, ‘아몬드’를 읽고.
나는 한때 정점을 찍고 잊히고 마는 베스트셀러보다는 정점을 찍지 못하더라도 꾸준히 읽히는 스테디셀러를 선호한다. 한번 가볍게 읽고 마는 대중소설보다는 조금 공을 들여야만 읽어낼 수 있고 읽고 나면 소장하고 싶어지는 고전소설을 좋아한다. 그 시대의 흐름과 사람들의 관심도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대를 관통하여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는 그 힘을 나는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알라딘 웹사이트에 들어가 책을 훑어보는 나로선 손원평의 ‘아몬드’를 놓쳤을 리가 없다. 우선 표지부터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주인공인듯한 한 소년의 얼굴. 표지 전체를 차지하는 증명사진 식의 큰 그림. 제목 ‘아몬드’, 그리고 한 소년의 얼굴. 호기심이 발동했다. 나의 짧은 상상력으로는 도무지 두 가지가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작품 소개를 들춰보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 책은 읽어볼 만하겠다는 왠지 모를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해석을 통과한 관점으로 이 책을 읽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일 년이 훨씬 넘도록 늘 보관함에만 간직하고 있었다. 며칠 전, 마침 새책과 다름없는 중고책으로 구매가 가능해서 다른 책들과 함께 구매를 했다. 두 시간 만에 다 읽었다. 정유정의 필체가 생각날 만큼 유난히 책장이 빨리 넘어가는 작품이었다. 작가 손원평의 탁월한 필력과 그녀가 사용한 단문의 연타는 흡입력과 속도감을 제대로 구현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속도와는 상관없이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를 다룬다. 한국 사회, 특히 청소년과 연결된 사회문제의 단면을 소설이라는 허구적 장치를 통해 정확히 짚어낸다. 허구에서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현실을 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익명성에서 안전함을 찾아내고 그 안에 숨어들어 비겁한 자신을 옹호하는 군중들의 심리, 겉과 속이 너무나도 다른 인간의 파렴치한 모순, 그 이율배반성이 ‘정상’ 혹은 ‘평범’이라는 탈을 쓴 참혹하고도 슬픈 아이러니, 시한폭탄 같은 그 아이러니가 만들어내는 사건 사고, 그 현장에서 고스란히 피해자가 된 한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국 사회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충분히 공감하고도 남을 만한 이야기로 잘 그려진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앞서 언급한 한 소년, 이름이 ‘윤재’인 청소년의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였다. 작가는 윤재를 ‘감정 표현 불능증’이라고 알려진 ‘알렉시티미아 (Alexithymia)’라는 선천적 질환자로 설정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한국 사회를 가능한 한 거짓 없이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기술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가 들어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 질환에 걸린 윤재는 앞서 언급한 ‘정상적’이고 ‘평범한’ 인간들의 모순 혹은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가질 수도 없는 결함 (?)을 가진다. 일반적으로 한 시스템을 객관적으로 기술하기에 있어서 그 시스템 바깥에 존재하는 인물의 시선을 차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작가는 이 작품 속에서 다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같은 시스템 안에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선천적으로 다른 시선을 가진, 그래서 마치 외부 인물의 시선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윤재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즉, 윤재에게 이 질환을 허용한 작가의 의도는 윤재에게 연민을 갖게 하거나 이런 질환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에 숨은 폭력성을 누설하고 수정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 시선이 의도하지 않게 가지는 고유한 객관성 (?) 혹은 솔직 담백함 (?)을 렌즈로 삼아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 역설적인 관점은 소설만이 가지는 장점을 아주 잘 활용한 결과이고, 작가의 탁월한 인물 설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 작품이 가지는 핵심이 아닌가 한다.
(참고: 이 질환은 공식 의학용어로써 편도체의 작은 크기와 상관관계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편도체가 작다고 해서 모두 이 질환에 걸리는 것도 아닐뿐더러, 이 질환의 원인이 편도체의 작은 크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리고 사이코패스와는 다른 질환이다.)
이 작품은 제10회 창비 청소년 문학상 수상작이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은 오히려 성인이 더 많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청소년과 직접적인 관계를 해야만 하는 부모님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다. 비린내 나는 어른들의 냄새와 인간의 본성, 그리고 청소년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작용할 것이다.
#창비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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