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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함의 이면.

오가와 요코 저, ‘임신 캘린더’를 읽고.

오가와 요코에게 1991년 아쿠타가와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준 작품, ‘임신 캘린더’를 포함하여 이 책에는 ‘기숙사’, ‘해 질 녘의 급식실과 비 내리는 수영장’이라는 두 단편소설이 더 실려 있다. 이 글은 세 작품 중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임신 캘린더'에 대한 감상문이다. 

임신을 경험해 본 적도, 경험할 수도 없는 내가 이 책을 손에 들게 된 이유는 전혀 특별하지 않다. 먼저, 몇 달 전부터 오가와 요코의 글이 좋아졌다. 그리고 마음이 심란하고 시간에 쫓기는 일상으로 치달을 때 그녀의 글을 읽으면 환기가 되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쉬이 지나칠 사소한 것들의 소중한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상을 되돌아보게 도와주는 내 인생의 antidote랄까. 책장에는 아직 대기 중인 그녀의 작품 두 권이 더 있다. 괜히 마음이 놓인다.

딱 한 번 나는 아내를 통해 임신 전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아내의 배가 서서히 불러오는 과정은 진기했다. 머리로 아는 지식과 현실 속 경험은 언제나 괴리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의사인 아내와 생물학자인 남편에게도 그 놀라움은 마찬가지였다. 불러오는 배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에게나, 그 배를 옆에서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사람에게나, 생물학적 원리를 상세하게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나 똑같이 신기했던 것이다. 정확히 예정일에 맞춰 아들이 태어났고, 터지면 어떡하나 싶을 정도로 단단히 부풀어 오른 아내의 배는 곧 터진 풍선처럼 쭈그러들었다. 아이가 태어난 날을 떠올리면, 사실 나는 아들 녀석보다는 서른 시간 직접 해산의 고통을 겪어냈던 아내의 모습이 기억에 더 많이 남아있다. 다리를 벌리고 힘을 주던 그 숙연했던 장면. 땀이 범벅이 되어 머리카락이 얼굴과 목과 이마에 끈적하게 달라붙어있던 아내의 모습. 나는 그 시끄러웠던 적막 속에서 첨예한 긴장을 느끼며 무능력하게 서 있기만 했다. 모든 게 처음이었고, 모든 게 낯설었으며, 모든 게 서툴렀다. 다행히 모두 무사했다. 지금 생각하면 기적인 것만 같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에게 아이의 생일은 아내가 죽다 살아난 날이기도 하다. 그 이후로도 아내의 쭈그러든 배를 만지면 나는 그날을 떠올린다. 그리고 자못 숙연해진다. 

위에 적은 나의 기억은 아무래도 간접적이고 정제된 입장일 것이다. 임신 당사자의 직접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남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예민해진 아내와 식성이 변한 아내를 맞추려고 노력하면서도 어설플 수밖에 없는 모습을 가능한 신경전 없이 유쾌하게 헤쳐나가는 것밖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남편의 입장, 즉 임신 당사자가 아닌 임신 당사자를 간접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이 마치 ‘임신’ 하면 생각나는 자연스러운 공식 입장이 된 것 같아 나는 종종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이 작품 ‘임신 캘린더’는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물론 이것 역시 소설이라는 허구적 장치와 일인칭 관찰자 시점이라는 제한 때문에 간접적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순 없겠지만 말이다.


언니가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기까지 같은 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여동생이 이 작품의 화자다. 여동생은 언니의 임신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 혹은 곧 태어날 아이로 인해 생겨날 긴장 어린 행복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보인다. 자신이 직접 임신을 한 게 아니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오히려 임신 때문에 입덧을 하게 된 언니와 그 언니를 수발하며 무능력하게 조심스러운 형부, 그리고 그 때문에 요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밖에 나가서 밥을 먹어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기록해나간다.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얻어온 그레이프 후르츠로 잼을 만들어 과체중으로 임산부로서 위험한 상태에 처한 언니에게 계속해서 그 잼을 공급해준다. 그 과일에 아이에게 해로울지도 모르는 물질이 들어있다는 말을 들었고 알고 있음에도 그 일을 지속한다. 여동생의 행동에 의아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언니의 행복이나 아이의 생명을 해치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렇게 알 것 같으면서도 끝내 알 수 없는 입장을 고수하다가 작품은 끝에 다다른다. 

여동생뿐만이 아니다. 임신 당사자인 언니 역시 임신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기쁨과 행복에 들뜨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입덧으로 아무것도 못 먹다가 입덧이 사라진 즉시 먹는 기계가 된 것처럼 쉬지 않고 먹어대는 동물의 이미지마저도 떠오를 정도였다. 곧 태어날 소중한 생명을 품고 있는 위대한 예비 엄마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이 작품에서 거의 무시되는 형부 정도의 입장밖에 이해하지 못하지만, 어쩌면 언니나 여동생이 ‘임신’에 대한 직접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조금은 섬뜩하다는 생각, 조금은 이해할 것만 같은 생각, 그러나 나중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다다르고야 말았다. 임신 우울증, 산후 우울증 같은 단어가 언젠가부터 낯설지 않게 들리는 것도 어쩌면 그런 것들이 임신에 대한 임신 당사자의 솔직한 입장이 더 진하게 담겨있는 건 아닐까, 새로 태어나는 생명에 대한 숭고함 앞에서 감히 입 밖으로 내놓지 못하는 그 무언가가 있지는 않을까, 이런 걸 미리 알았다면 조금이라도 더 멍청하지 않은 남편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답 없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돈다.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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