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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특별함 혹은 인간다움이란?
가즈오 이시구로 저, ‘클라라와 태양’을 읽고.
인간은 특별할까? 다른 생물체에 비해, 다른 동물들에 비해 과연 무엇이 특별한 걸까? 특별하다면 그 특별함은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기인한 걸까? 아니면, 철학적 혹은 신학적 의미를 부여해야만 하는 걸까? 인간의 특별함은 이미 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사회정치학적으로 수없이 다뤄진 주제이고, 지금도 여전히 이에 대한 논쟁이 그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면, 아직 이렇다 할 답에 이르지 못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공상과학에서나 상상할 수 있었던 클론이니 인공지능이니 하는 것들이 점점 더 현실화되고 있는 추세도 있기에 이런 현상은 계속 지연되고 지연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보면 우린 끝내 답을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것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적어도 이런 논쟁을 역사적으로 지속하고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인간의 특별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 않나 싶다.
하이데거는 인간만이 존재의 의미를 묻고 드러내는 유일한 존재자, 즉 현존재라고 정의했다. ‘모든 인간은 의미 중독자’라는 우스갯소리는 결코 우습게 넘길 말이 아닐 것이다. 모든 인간은 소위 ‘본능적인 행동’이라고 부르는 ‘숨 쉬고 먹고 자고 싸고 성장하고 번식하는’ 행위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동물이다. 따지고 보면 자살이라는 행위를 범하는 유일한 존재자 역시 인간이기도 하다. 이 역시 의미를 묻고 찾고 따지는 인간의 속성과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인간은 철학적인 관점에서 여느 생명체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기독교 신학적인 관점에서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의미로써 특별하다. 인간만이 창조주로부터 그 타이틀을 부여받았다. 창조세계를, 즉 인간 이외의 모든 동물과 식물을 포함한 자연계 전체를 다스리고 관리하고 섬기며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는 신적 대리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는 어떨까? ‘종속과목강문계역’과 같은 전통적인 생물 분류도에서나, 다윈의 진화론이 반영된 계통 분류도에서나 마찬가지로 인간은 가장 고등한 동물로 정의된다. ‘DNA 변이에 의한 다양성’이라는 진화의 좁은 관점으로만 보면 인간이 가장 진화한 생명체라고 단박에 정의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진화에 있어서 최상위권에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며, 모든 동물과 식물을 먹이로 삼을 수 있고, 그것들을 함부로 파괴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것처럼 자연스레 행동하는 유일한 생명체가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피라미드 형태의 생태계에서도 인간은 도구의 사용과 탐욕으로 꼭대기를 차지한 지 오래다. 이런 일련의 현상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누가 지구의 주인일까?”라는 질문 앞에서 당당하게 “인간”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한낱 산업혁명 시대의 유물일지도 모른다. 역사적으로 개척은 파괴가 되었고, 발전은 모든 생명체가 공존할 터전의 상실을 가져왔다. 생물학적인 인간의 특별함의 근거를 크고 발달한 뇌와 고등한 지능에서 찾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들이 마음껏 사용된 결과들의 부정적이고 추악한 꼴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인간의 특별함이 무슨 가치가 있었는지 우린 조용히 되물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록 그 쓰임새가 악의 도구로도 이용된 듯하지만 어쨌거나 인간은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 중에서 가장 고도의 지능을 소유한 생명체이다. 얼마 전부터 ‘뇌과학’이라는 학문이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아진 이유도 전혀 낯설지만은 않다. 모든 세상은 뇌로 조절하거나 만들어내는 현상일 뿐이라는 다분히 철학적인 주장도 있고, 영혼마저도 뇌의 부산물이라는 유물론적인 주장, 프로이트가 밝혀낸 무의식의 영역도 뇌세포의 기능을 밝혀내면 모두 파헤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들의 주장까지 인간의 뇌는 알려진 것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여전히 많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영역이다.
여기서 질문을 살짝 바꿔보자. ‘인간의 특별함’을 ‘인간의 우월함’이 아닌 ‘인간의 인간다움’이라는 의미로 말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인간다움이란 도대체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는 없겠지만, 생물학적으로도 공인된 인간의 뇌의 우수성을 전제할 때 우린 뇌가 작동하고 영향을 미치는 크게 두 가지의 영역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성과 감성이 그것이다. 이성은 논리, 합리성 등을, 감성은 감정, 공감 능력 등을 대변한다고 보면 되겠다.
IQ가 모든 것인 것처럼 여겼던 시절이 지나고 EQ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던 것도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똑똑하기만 해선 인간이 인간답다고 말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널리 퍼진 결과였다. 문학적인 표현까지 들어서 ‘메마른 사람’이라느니 ‘냉혈한’이라느니 하는 단어는 이미 우리에게 친숙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어느새 인간다움의 정의를 이성의 작용만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감성의 영역으로 확대시켜 이성과 감성 간의 조화로써 설명하려고 애쓰게 된 것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은 이러한 ‘인간의 특별함’ 혹은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소설의 허구적 장치를 활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도록 만드는 작품이다. 클라라는 AF (Artificial Friend)라고 불리는 인공지능 로봇이다. 가게에 가서 돈을 주고 구입할 수 있으며 각 AF마다 다른 캐릭터를 가지고 있어서 구매자의 기호와 요구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도 언젠가는 곧 닥칠 가까운 미래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이 작품에서 클라라의 시선을 통해 독자들이 인간을 한 걸음 떨어져서 객체화시켜 바라보게 만든다. 말하자면 인간을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을 같은 시스템 내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화자가 아닌 로봇 화자가 이끌어가는 이야기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그동안 잘 보지 못했던 인간의 거짓되고 위선적인 모습들, 혹은 파렴치하고 이기적인 모습들을 관조할 수 있게 된다. 나에게 읽힌, 저자가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내가 위에서 언급했던 ‘공감력’인 것 같았다. 단적인 예로 클라라보다 한 단계 더 진보한 버전의 AF와 클라라가 속한 버전을 비교하는 대화를 들 수 있다. 다음과 같다.
“새로 나온 B3가 인지 기억 능력이 아주 뛰어나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공감력이 좀 부족한 경우가 있다고 하던데요.”
그렇다. 클라라는 다른 AF 보다, 심지어 기술적인 면에서 더 완성도 높게 제작된 B3 레벨보다도 공감력에 있어서는 월등했던 로봇이다. 로봇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클라라는 사람의 내면을 관찰하고 생각하고 분석할 줄 안다. 무엇보다 사람을 공감할 줄 안다. 마치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런 독특한 캐릭터인 클라라를 통해 인간의 특별함 혹은 인간다움은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공감력에 있다고 넌지시 짚어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또한 클라라를 구입한 조시 엄마의 계획은 클라라를 조시의 대용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조시는 아팠다. 언니처럼 곧 죽을지도 몰랐다. 그때를 대비해 조시 엄마는 클라라로 하여금 조시의 모든 것을 배우고 복제하길 바랐던 것이다. 행동이나 표정뿐만이 아닌 마음 씀씀이 마저도.
과연 어떤 특정한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아무리 공감력이 뛰어난 클라라라고 하더라도 그건 불가능한 영역의 일일 것이다. 작품 속에는 그게 가능하다고 믿었던 사람도 등장하고 절대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도 등장한다. 이들의 갈등 구조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클라라는 과연 어느 쪽이었을까? 스포를 하고 싶지 않아 힌트가 될 만한 대사를 아래에 적어본다. 조시 아빠의 대사다.
“너는 인간의 마음이라는 걸 믿니? 신체 기관을 말하는 건 아냐. 시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이야. 인간의 마음. 그런 게 존재한다고 생각해? 사람을 특별하고 개별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 만약에 정말 그런 게 있다면 말이야. 그렇다면 조시를 제대로 배우려면 조시의 습관이나 특징만 안다고 되는 게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걸 알아야 하지 않겠어? 조시의 마음을 배워야 하지 않아?”
아래 역시 조시 아빠의 대사다.
“하지만 네가 그 방 중 하나에 들어갔는데, 그 안에 또 다른 방이 있다고 해 봐. 그리고 그 방 안에는 또 다른 방이 있고. 방 안에 방이 있고 그 안에 또 있고 또 있고. 조시의 마음을 안다는 게 그런 식 아닐까? 아무리 오래 돌아다녀도 아직 들어가 보지 않은 방이 또 있지 않겠어?”
공감력에 탁월했던 클라라의 결정은 의미심장하다. 공감을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다고 해서 결코 그 사람과 똑같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특별함은 고등한 뇌 덕분이라고 생물학적으로 말할 수 있고, 뇌가 작동하는 두 가지 영역 중에서도 감성적인 측면, 즉 공감력에 인간의 인간다움이 심겨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한 개인은 탁월한 인간다움으로도 결코 복제할 수 없다는 것. 모든 인간은 고유한 존재라는 것. 가장 인간다운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감력을 넘어서는 인간의 고유한 개별성. 저자는 바로 여기에 인간의 특별함 내지는 인간다움이 숨어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이 작품은 나의 두 번째 책의 두 번째 문학 파트너로서 당당하게 후보로 오른 작품이기도 하다. ‘인간의 특별함’에 대한 생물학적인 측면에 상응할 문학작품으로 ‘클라라와 태양’이 적당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이전 작품 ‘나를 보내지 마’도 읽고 나서 천천히 결정해야겠다. 인간의 뇌, 이성과 감성, 지능과 공감력. 흥미로운 글이 탄생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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