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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작은 소리, 잘 사는 삶

가난한선비/과학자 2021. 8. 29. 04:51

작은 소리, 잘 사는 삶


느지막이 일어나 부은 얼굴로 침대에 걸터앉아 티미한 눈으로 시계를 쳐다보며 좀 더 잘까 그냥 일어날까, 주말에만 가능한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평소엔 잘 들리지 않던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누군가가 클래식 음악을 크게 틀어놓은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가만히 귀 기울여 듣고 있으니 가끔 틀리기도 하고 같은 소절을 반복하기도 했다. 누군가가 연주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작년 생각이 났다. 


여기로 이사 온 지 1년 반 정도 되었다. 이사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로 기억한다. 그날도 피아노 연주 소리가 들렸다. 아들과 함께 어디서 피아노를 치나 확인하러 슬리퍼를 신고 밖을 나섰다. 소리를 쫓아 이 집이야 저 집이야 아들과 실랑이를 잠시 벌이다가 정면에 마주 보고 있는 집이 아닌 오른쪽으로 두 칸 옆 집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피아노 잘 치는 사람이 이 집에 사는구나, 하며 우린 집으로 돌아왔고, 아들은 그것도 못 맞추냐며 나를 약 올렸다. 상관없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흐뭇한 기분에 마음에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나는 계속 이어지는 그 소리에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리가 끊어질 때까지. 일상에 흩어진 소소한 행복의 조각을 하나 주운 기분이었다.


내가 사는 콘도 단지는 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미국은 목조건물이 기본인지라 방음 효과가 형편없다. 가끔은 부부 싸움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처럼 피아노 소리를 감상할 수 있는 통로도 된다. 내가 놓인 일상. 내가 계획하지 않았던 시간과 장소. 그 안에 숨겨진, 눈이 바쁜 사람에겐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보화를 하나둘 발견하고 그것에서 경이감을 느끼며 감사하는 삶.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살아내지 못하는 삶. 이런 삶에 조금이나마 눈을 뜨게 된 사실에 적잖이 감동이 되는 날이었다. 


한편, 오늘 아침 피아노 소리와 함께 새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살짝 내 마음이 무너지기도 했다. 크고 높은 것, 강한 것, 효용 가치가 높은 것들이 내는 소리 없는 큰 소리를 쫓아 내 젊음을 탕진한 것 같아서. 작은 소리들을 방해거리로 여긴 채 애써 무가치하다 짓밟고 무시해온 내 이삼십 대가 처량하게 느껴져서.


작은 소리에 더 예민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둥둥 큰 북소리를 내며 내 마음과 생각을 흥분시키고 영혼까지 잠식시키는 끝없는 탐욕의 불꽃에 내 인생을 모두 태우고 싶지 않다. 작지만 사그라들지 않는 이 변함없는 소리들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겠다. 나아가, 나도 그 소리를 노래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본다. 누군가가 나의 노래를 듣고 같은 마음을 먹을 수만 있다면, 죽기 전에 이를 이룰 수만 있다면, 인생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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