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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살아내는 삶

가난한선비/과학자 2021. 10. 17. 06:04

살아내는 삶

‘살다’가 아닌 ‘살아내다’라는 말의 방점은 ‘의지’에 있다. 수동적으로 시간을 때우는 삶이 아닌 적극적으로 개척해나가는 삶을 뜻한다. 삶에 잠식당하지 말고 삶을 견인하라는 말이다. 

종종 이러한 삶은 성공적으로 뭔가를 성취해내야만 하는, 그래서 남들에게 가시적인 뭔가를 보여줘야만 하는 삶으로 오해된다. 소수의 특별한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삶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마치 빈 도화지 위에 멋진 그림을 그려 넣어야 비로소 ‘사는’ 게 아니라 ‘살아낼’ 수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살아낸다는 말의 시작점으로 빈 도화지를 떠올린다면 곤란하다. 인생을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어린아이라면 모를까, 유아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삶의 시작은 빈 도화지가 아닌, 이미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많은 것들이 들어찬, 그러나 여전히 무질서한 미완성의 그림이다. 우린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그 미완성의 그림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 사실, 즉 빈 도화지가 아닌 무언가가 이미 그려져 있는 (이때 누가 그 그림을 그려놓았는지 묻는 건 신학적인 영역에 속할 것이다) 미완성의 그림을 우리 삶의 시작점으로 겸허히 인정하게 될 때 우린 비로소 삶을 그저 ‘사는’ 게 아니라 ‘살아낼’ 수 있는 제대로 된 기회를 가지게 된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 사이의 괴리가 직접적인 증거다. 어른이 되면서 책임감이 늘어간다는 말은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만 하는’ 일의 비중이 점점 커진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 ‘해야만 하는’ 일이 ‘하기 싫은’ 일이 되어버릴 때 우리가 느끼는 괴리감은 극대화되고 과연 ‘살아내는’ 일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게 된다. 많은 이들은 이런 과정을 거치며 인생 다 살아본 것처럼 흉내 내는 꼰대의 길로 빠진다. 삶을 살아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치기 어린 과거의 모습으로 쳐다보며 한낱 젊은이들의 객기로 간주하거나 이상에 심취해있는 사람, 혹은 몽상가로 보게 된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그제야 ‘살아낸다’라는 말의 의미를 머리가 아닌 몸으로 깨닫고 성숙하게 된다. 

살아낸다는 말은 적극적인 의지가 반영되는 말이지만, 그 적극적인 의지는 우리 삶에 이미 주어진 많은 것들의 무질서함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바로 잡으면서 그것들을 안고 자족하며 당당하게 살라는 뜻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게 아니라, 저마다 다르게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들로부터 고유한 개성을 나타내며 다양성의 한 축을 담당하라는 말이다. 즉, 적극적인 의지는 개척정신이 아닌 객관적으로 자기 자신과 주위 사람, 그리고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눈에서 시작한다. 말하자면 객관적인 관찰과 성찰을 거친 인정과 수용이다. 남들과 비교할 필요 없다. 저마다 다른 밑그림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단, 그 밑그림은 지울 수 없다. 그걸 지우려고 애쓰는 과정은 가능한 짧을수록 좋다. 

밑그림에 질서를 잡으며 자기만의 고유한 개성을 나타내고, 그 개성이 다양성의 한 부분이라는 점을 인지하는 사람. 나는 이런 사람을 아름다운 사람이라 부르고 싶다. 깊은 통찰력과 사려 깊은 눈을 가진 사람이리라 확신한다. 살아내는 사람. 나도 내게 주어진 이 삶을 반드시 살아내고 싶다.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닌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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