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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한 심리로 굴절된 인생, 절제로 표현하다.

가즈오 이시구로 저,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를 읽고

이 작품은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 마스지 오노는 한때 유명했던 은퇴한 화가로, 세계대전 중 아내와 아들을 잃은 후 포화에 부서진 호화로운 옛 저택을 손보며 살고 있다. 둘째 딸 노리코가 어느 명망 있는 집안의 아들과 맞선을 앞둔 어느 날, 결혼한 맏딸 세쓰코가 친정에 놀러 온다. 그녀는 맞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과거 일에 대해 미리 조치를 취해놓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오노를 은근히 압박한다. 그는 자신으로 인해 둘째 딸의 혼삿길이 막힐 것을 염려하여 과거의 인물들을 한 명씩 찾아가기 시작하고, 그렇게 그의 과거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젊은 시절에 스승의 순수 예술적 노선을 배신하고 전쟁과 천황을 찬양하는 그림을 제작하여 명예와 부를 누렸던 그에게 남은 것은 전범이라는 비난의 눈길뿐이다. 그는 과거에 했던 일에 대해 반성하는 한편 신념에 차 행동하고 성취를 맛보았던 경험에 대해 은밀한 자부심을 느낀다. |

책 뒷면에 실린 요약문을 그대로 옮겨온 이유는, 먼저 나로선 줄거리를 이보다 더 잘 요약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고, 솔직히 그럴 필요도 못 느꼈으며, 무엇보다 이 작품은 줄거리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나날’로 내게 강한 여운을 남겼던 가즈오 이시구로를 다시 만나게 된 건 올 초 그의 신작 ‘클라라와 태양’을 통해서였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쉽게 드러나지 않고 함부로 표현할 수 없는, 다른 작가의 글에서는 좀처럼 느끼지 못했던 그 무엇을 나는 그의 글에서 어렴풋이 포착했던 것 같다. 그 이후 그의 모든 작품을 읽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고, 실제로 그렇게 조금씩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클라라와 태양’에 이어 나는 ‘나를 보내지 마’를 읽었고, 몇 달이 지난 오늘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라는 제목의 이 작품을 이틀에 걸쳐 읽었다. 이로써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 중 네 편을 읽게 된 셈이다.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한 작가의 작품들을 하나씩 훑어볼 때에만 느낄 수 있는 은밀한 기쁨과 무언의 확신이 이 책을 덮으면서 내 안에 조용히 스며들어왔다. 한두 권만으로는 좀처럼 읽어낼 수 없는 막연한 그 무엇이 어느 날 형체를 가지게 된 것처럼 선명해지는 느낌은 책을 진정으로 좋아하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아는 묘미이지 않을까 한다. 이제야 가즈오 이시구로의 글을 제대로 대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야 조금 가즈오 이시구로가 그리는 큰 그림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책장에 꽂혀있는 그의 다른 네 작품이 벌써 기다려진다.

이 작품에서 나는 ‘남아 있는 나날’에서 느꼈던 애잔함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노년의 한 남자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조용히 이야기를 풀어가는 서술 방식, 그 과정에서 조금씩 보여주는 화자의 감정과 심리의 미묘한 변화, 과거에 대한 참회와 합리화의 경계를 오가는 듯한 묘한 긴장감. 거기에 절제된 글쓰기까지. 나는 이런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에 흐르는 작품의 깊은 맛을 느끼면서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어느새 화자가 되어 잔잔한 애수를 느끼며 먹먹한 가슴을 안은 채 나 자신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내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리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도 않아 일부의 독자는 아마도 이 작품의 맛을 밋밋하다거나 재미없다고 평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바로 거기에 가즈오 이시구로만이 가진 고유한 매력이 녹아있다고 생각한다.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상황 속에서 삶의 본질과 인간의 본성 및 심리를 조심스럽게 들춰내어 독자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는 글. 이런 마법 같은 글의 위대성을 음미하고 싶다면, 씹으면 씹을수록 깊은 맛이 느껴지는 글을 읽고 싶다면, 나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을 조용히 권하고 싶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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