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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약하고, 취약할 수밖에 없으며, 취약해도 되는 우리

티시 해리슨 워런 저, ‘밤에 드리는 기도’를 읽고

성공회 사제이자 작가이기도 한 이 책의 저자 티시 해리슨 워런은 2017년 아버지를 잃는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유산과 과다출혈로 응급실에 실려가 생사의 갈림길에 선다. 그렇게 예기치 못한 상실과 고통과 슬픔으로 인생의 낮고 어두운 시간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다. 견뎌낼 수 있었다.

밤과 같이 어둡고 외로운, 그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기간을 견뎌낼 수 있었던 이유로 그녀는 밤기도를 든다. 밤기도를 드림으로써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고 견뎌낼 수 있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에세이인 동시에 성공회에서 사용되는 여러 기도서 중 특별히 밤기도 예식이 끝나 갈 무렵 나오는 한 기도문 (밤기도문)에 대한 해제다. 그래서 이 책을 보다 깊이 공감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래의 기도문을 먼저 마음 담아 읽을볼 필요가 있다. 다음과 같다.

| 사랑하는 주님,
이 밤에 일하는 이, 파수하는 이, 우는 이의 곁을 지켜 주시고,
잠자는 이를 위해 당신의 천사들을 보내소서.
주 그리스도여, 병든 이를 돌보소서.
피곤한 이에게 쉼을 주시고,
죽어 가는 이에게 복을 주시고,
고난을 겪는 이를 위로하시고,
고통에 시달리는 이를 불쌍히 여기시고,
기뻐하는 이를 보호하소서.
주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기도합니다. 아멘. |

이 책은 총 1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입부인 첫 장을 제외하고 나머지 열두 장에서 저자는 위에 적힌 밤기도문의 각 구 혹은 각 문장을 자신의 살아있는 경험과 사유를 토대로 해석해낸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과 불안을 마주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 여러 중독으로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하며 견뎌냈던 경험이 있는 사람, 그 견딤의 시간 동안 무신론에 기반을 둔 철학이 아닌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자아의 발견, 성찰, 성장, 성숙을 이뤄냈던 경험이 있는 사람, 그런 인고의 과정을 견뎌내면서 자신을 객관화하여 바라볼 줄 알고 마침내 하나님과 타자와 세상을 새롭게 인식하고 비로소 모두를 존중하고 섬길 수 있는 상태로 나아간 경험이 있는 사람. 티시 해리슨 워런은 사제와 작가라는 정체성만이 아닌,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친 한 사람의 증인으로서 이 책을 썼다. 즉, 이 책은 누굴 가르치거나 단순히 책을 만들기 위해서 써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 그리스도인의 진정성 어린 고백이 담긴 글이다.

밤기도문을 읽어보면 처음엔 상투적인 표현들로 가득한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수 있다. 내가 그랬다.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왜 그런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게토화 된 교회 용어에 익숙해져 버린 내 모습이 보였다. 영혼이 없는 감언이설로 도배하곤 하는 원만한 인간관계와 상대방에게 좋은 말을 하면서도 그 목적은 나도 그 좋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길 원하는 이기적이고 더러운 내 자아가 보였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흔해빠진 말에서 염증을 느꼈다. 이 책 덕분에 나는 나를 다시금 돌아볼 수 있었다.

저자는 밤이라는 단어에서 풍성하고 깊은 의미를 뽑아낸다. 열두 장에서 다루는 밤기도문의 해제는 모두 인간의 취약함을 전제한다. 밤이란 취약한 시간이다. 밤은 대부분 자는 시간으로 이뤄지고 무장해제된 우리 자신의 민낯을 편안히 드러내는 시간이다. 방해받지 않고 가장 나 다울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가장 취약한 시간, 우린 밤에 거짓 없는 우리 자신을 만난다.

밤기도는 바로 그 시간을 열면서 드리는 기도다. 여러 중독에 빠져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도 많다. 술과 담배와 마약과 섹스와 도박만이 아니다. 중독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 영화, TV, 게임 등 우리에게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친숙한 것들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실제로 우린 저마다 다른 양상으로 어느 정도 이런 것들로 인해 중독되어 있기도 하다. 남들에게 드러내지 않은 모습들, 가장 사적이고 가장 솔직한 모습들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시간, 밤. 밤기도로 밤의 문을 연다면 얼마나 나의 일상이 변화될 수 있을까, 하고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이 밤기도는 취약한 사람들을 위해 주께 간구하는 기도다. 우리 주위에는 밤에 일하는 이도 있고, 파수하는 이도 있으며, 우는 이도 있다. 잠자는 이, 병든 이, 피곤한 이, 죽어 가는 이, 고난을 겪는 이, 고통에 시달리는 이, 그리고 기뻐하는 이까지, 저자는 이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길 빈다. 그리고 이렇게 가능한 근본적인 이유를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 사랑에서 찾는다. 그 사랑에 의지할 때에만 모든 취약한 사람들 (모든 인간들을 대변하는 표현이라 읽을 수도 있겠다)을 위해 마음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가 된다. 아멘으로 화답한다. 

이 책은 천천히 읽어야 한다. 하루 만에 다 읽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어려운 내용은 전혀 없지만, 이 책을 가득 매우고 있는 평이한 문장들은 무게를 가지고 힘을 가진다. 좋은 글이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로 표현되면서도 묵직한 울림을 주는 글인 법이다. 나는 이 책을 일주일 넘게 밤마다 천천히 조금씩 읽어오면서 저자와 공감하려고 노력했다. 그게 예의인 것 같았고,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특히 저자의 글은 묘한 설득력이 있어서 뻔하다고 여겼던 진실들을 재조명하여 숨은 의미를 드러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저자의 글에 매료되면서도, 동시에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메말라 있는 내 마음에 단비가 내리고 얼어버린 내 마음에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뭄이 끝나고 해빙을 맞이한 나는 이 책과 저자에게 감사를 표한다.

센 척하고, 아무 일도 없는 척하고,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척하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나로 돌아가는 시간. 밤마다 우리는 인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취약하고, 취약할 수밖에 없으며, 취약해도 된다고. 단,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한다면 말이다. 

#IVP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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