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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응할 것인가, 순종할 것인가.
짐 월리스 저, ‘부러진 십자가’를 읽고
(부제: 무엇을 따르고 무엇에 저항할 것인가)
이 책은 1976년에 출판된 짐 월리스의 초기작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의 다른 대표작 ‘회심’, ‘하나님의 정치’는 그로부터 각각 5년, 29년 뒤에 출판되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선 젊었던 시절 짐 월리스의 뜨거운 열정과 한을 정제되지 않은 상태로 잘 느낄 수 있다. 복음주의 단체 ‘소저너스 (Sojourners)’의 설립자이자 대표인 그 역시 비록 몇 년 전 자금과 관련된 논란을 일으키며 한계를 가진 지도자라는 점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같은 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이기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미국과 미국 기독교에 대한 민낯을 직시, 폭로하고 예언자적 목소리를 높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들이 가진 권세와 그것들이 주는 거짓 평화에 저항하고 성서적인 기준에 맞춰 그리스도의 제자 된 삶을 현실에서 살아내려고 애쓴 그의 노력과 실천은 결코 폄하되어선 안 될 것이다.
폭력으로 평화를 실현한 미국 (‘팍스 아메리카나’라고도 부른다. ‘팍스 로마나’에서 빗댄 표현이다. 즉 미국은 방식만 다를 뿐이지 본질적으로 과거 로마 제국의 전처를 밟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 내부에서 국가와 사회의 세속적 가치에 타협하고 순응하며 한낱 종교가 되어버린 기성 기독교. 이러한 공생관계에서 교회는 필연적으로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변질될 수밖에 없었다. 대기업의 구조와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세상의 통상적 가치들에 저항하고 그것을 전복하기보다는 그것을 고스란히 따르거나 그것에 맞추어 하나님 말씀을 감히 해석하는 크나큰 우를 범했다. 뿐만 아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구약에서 일관되게 선포되고 신약에서 예수의 핵심 사상이기도 했던 ‘하나님 나라’를 그저 개인의 마음 한 구석으로 제한함으로써 사적인 문제로 축소시켰고, 그 나라를 오로지 막연한 천국으로 제한함으로써 영적인 문제로 치부하여 신앙과 삶을 분리시켰으며,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이 마치 천국행 티켓이나 되는 것처럼 값싼 구원으로 전락시켰다. 게다가 마지막 때의 종말론적 사건과 관련지어 말함으로써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 관계에 놓인 하나님 나라를 죽어서나 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 현재성을 거세시켰다. 그 결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사실상 두 주인을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예수의 전복적인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마치 남들은 전부 사기치고 남의 등 처먹으면서 ‘영리하게’ 돈을 버는 상황에서 혼자 정직하게 땀 흘려 돈을 벌려고 하는 순진한 바보의 행동 따위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현실의 맥락에서 저자는 성서적인 기준에 맞춰, 세상에 속하지만 세상과는 다른,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무엇을 따르고 무엇에 저항할 것인지에 대해 이 책에서 논한다.
프롤로그에서부터 저자는 오늘날 최대 관심사가 시민종교가 되어버린 기성 기독교를 지지할 것인지 성서적 신앙을 실천할 것인지에 있다고 말한다. 그만큼 저자는 기성 기독교가 타협과 순응의 종교가 되어버렸으며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순종보다는 현실과 성공을 중시하는 대기업으로 변질되어버렸다고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질은 본질적인 것이며 성경에서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우상숭배와 다름 아니다. 이 시대의 우상숭배는 소비주의에 물든 정신, 힘과 권력에 의지하려는 마음, 인종차별과 성차별, 계급적 억압, 국가의 운명을 마음대로 하려는 오만함, 폭력 사용 등과 같은 문제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들은 이런 문제들에 침묵하고 있다. 저자는 사회정의 실현에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는 구원 이야기, 믿음을 현실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로 만들며 성서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시민종교는 정통 기독교의 탈을 쓴 거짓 종교라고 거침없이 일갈한다. 특히 미국의 종교는 여전히 미국이라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서슴지 않으면서 그는 성서적 신앙을 회복하자고 주장한다.
성서적 신앙은 단지 개인 구원과 개인의 안녕, 혹은 개인적 성취 따위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질서로서의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서 말미암는다. 저자는 현대 복음전도의 비극이 믿음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하는 데에 반해, 순종에 대해서는 적게 말한다는 점이라고 지적하면서 믿음과 순종을 별개로 다루게 될 때 복음은 혼탁해질 수밖에 없으며 전도자는 선포의 능력과 권세를 잃게 된다고 말한다. 복음이 그저 편안한 신앙과 단순한 공식으로 변질되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은 점점 타협 가능한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통탄을 금치 않는다. 그리스도의 급진적 요구는 날이 갈수록 느슨해졌고 제자도의 대가를 거리낌 없이 은폐하는 방식에 가려졌다. 개인의 변화와 구속을 하나님 나라에 적극 참여하는 것과 별개로 간주하면, 복음은 그저 자신의 안녕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은혜가 값비싼 이유는, 간편한 공식 따위를 외우기만 하면 예수를 믿고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목숨을 내어놓고 예수를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제자에게 주어진 사명은 예수를 믿는 것에 그치지 않고 따르는 것에 방점이 있다. 순종으로 이어지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힘 있는 자들이 여전히 모든 것을 가지게 되는 병폐적인 사회 구조에 많은 교회들이 앞장서 있다는 점은 이 시대의 비극이다. 부와 성공이 하나님의 축복과 동일하게 간주되는 문화는 교회 안에도 깊숙이 파고든 지 오래다. 그러나 없는 자들이 가진 자들에 의해 억압받고, 가진 자들이 풍요를 당연하다는 듯이 누리는 현실에 대해 하나님은 분노하신다. 성경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물론이며 예수의 복음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노골적으로 편애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면 부와 권력의 횡포에 맞서는 가난한 자들의 외침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는 하나님의 마음과 방향을 같이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이 시대의 힘 있는 자들의 가치과 구조에 순응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교회가 해야 할 사명은 평화, 화해, 복음전도, 그리고 예언자적 사역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맘몬의 요구는 물과 기름처럼 결코 양립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우리도 모르게 기성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현재 상태를 직시하고 저항하여 예수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먼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하고, 그 정체성에 맞는 새로운 질서와 생활양식을 만들고 그렇게 살아내야 한다.
45년이 지난 2021년 현재 시점으로 읽어도 짐 월리스의 외침은 유효하다. 교회가 무너지는 본질적인 부분을 통찰해낸 예언자적 목소리임이 틀림없다. 단지 귀담아 들어볼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성경 속의 여러 예언자들의 목소리, 여호와의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 복음, 예수의 전복적인 메시지와 삶을 새롭게 읽고 묵상하면서 내 눈을 가리고 있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부터 해방받고 저항할 이유를 제대로 발견해서 남은 인생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내고 싶다. 그리고 이런 뜨거운 다짐들이 다짐으로만 끝나지 않기를 간절히 간구한다. 순응에서 순종으로 내 삶이 나아가길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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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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