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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살아냄
자신이 믿는 것을 타자도 믿길 원할 때 우린 어떤 방식으로 타자에게 다가가야 할까? 자신이 믿는 것이 절대적인 진리이기 때문에 믿으라고 강요하는 방식? 아니면, 자신은 어떤 것을 진리라고 믿는데 이유는 이러이러하고 그 믿음대로 살아보니 이러이러한 점이 유익해서 너에게도 권하고 싶어, 라는 방식? 어느 것이 더 적절한 방식일까?
자신의 믿음에 객관성과 절대성을 부여하여 마치 그걸 안 믿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방식은 결국 타자를 이분법적으로 배제시키는 효과를 낼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자신처럼 믿는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인 자가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진리를 모르는 (혹은 배척한) 자가 되어 둘 사이에 우열의 관계가 생길 수밖에 없게 된다. 믿는 자들은 자연스레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해 어떤 모종의 우월감 (혹은 선택되었다는 생각, 즉 선민사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때 믿는 자들 사이에서는 크게 두 가지의 입장이 생겨난다. 하나는 믿지 않는 자들을 혐오하고 배제하는 입장 (이를 강경파라고 하자). 다른 하나는 그들을 불쌍하게 보는 입장 (이를 연민파라고 하자). 이 두 가지 입장이 사람의 표정과 행동으로 표현되면 마치 서로 정반대의 입장을 가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 출발은 같다. 두 입장의 시작이 공히 우월감 (혹은 선민사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린 물어야 한다. 과연 믿는 자들은 믿지 않는 자들보다 우월한 걸까?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보다 우월한 걸까? 그렇다면 그렇게 믿는 진리라는 게 정말 진리일까? 그것이 정말 객관성과 절대성을 가지는 것일까? 혹시 주관적이고 상대적이진 않을까?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라면 우월감이란 단지 허상일 뿐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절대적인 진리라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
반면, 자신이 믿게 된 경유를 아무리 운명적인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해도, 그 믿음조차 주관적인 선택이었음을 인정하고 타자에게 그것을 강요하지 않고 조심스레 권하는 입장은 타자를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평등한 입장에 서서 상대를 존중하며 자신의 믿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밝힐 수 있는 건전한 방식이다.
강경파든 연민파든 전자의 경우는 믿음이나 믿음의 대상 자체에 부여된 절대성에 절대적으로 의지하기 때문에 믿는 자 개개인의 삶은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다. 개개인은 믿음의 절대성이 드리운 그림자에 가려지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맥락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이 믿는 대상에게 부여된 절대성에 의지하여 그 믿음을 타자에게 강요하게 된다. 알다시피 이런 행위는 폭력이다. 그것도 자신이 마음대로 세운 위에서 아래로의 일방적인 폭력.
이에 반하여, 후자의 경우는 믿음을 가진 자의 삶이 수반되는 경향이 강하다. 주관적 선택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그렇게 믿기로 선택했던 자기 자신의 삶이 이전과 비교해서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는지, 자신과 타자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어떤 변화가 왔으며 그걸 실행에 옮기면서 어떤 작용과 부작용이 생겼고 그것들을 풀어갈 때 자신의 믿음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경험과 노하우가 기반이 된다. 이런 자세는 전자의 경우에 비해 어찌 보면 소극적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그건 상대를 동등한 위치에서 존중하는 자세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또한 후자는 전자에 비해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한 절대성을 타자에게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라는 것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수용에 대해 열려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주로 말과 글로 이루어지는 자신의 입장에 대한 강경한 주장이 아닌 직접 살아내는 가시적인 삶의 증거들이 묻어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강한 주장이나 논증 같은 건 중요하지 않게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후자의 입장으로 나에게 다가와 자신이 믿는 것을 조곤조곤 얘기하는 사람에게 더 끌리게 된다. 말보단 행동이고, 행동은 수천수만 개의 문자가 해낼 수 없는 강력한 힘을,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지니기 때문이다.
결론은 ‘살아냄’이다. 떠남과 정착으로 반복되는 우리의 인생. 대부분은 딱히 보여줄 것 없는 일상의 쳇바퀴 속에서 돌아가는 우리의 인생. 어쩌다 반짝 빛나는 순간보다는 우리의 인생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일상이란 거룩한 영역에서 자신이 믿는 대로 살아내고 있는지 아닌지가 관건인 것이다. 믿음은 곧 살아냄으로 번역되어야 비로소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참고: 이 글을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는 글로 받아들일 분들이 꽤 많이 계시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가 믿는 것은 복음만이 아닐뿐더러 무언가를 믿는다는 행위 없이는 우리의 인생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 있고 기능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을 기독교 복음 전파에 적용해서 읽는다면 기독교인들의 전도 자세에 대해 조금 돌아보는 기회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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