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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와 쓰기

정확한 글쓰기의 자세

가난한선비/과학자 2022. 11. 13. 09:43

정확한 글쓰기의 자세

단어를 사용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 중 하나는 단어 그 자체보다 그 단어가 쓰인 맥락이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동일한 단어라도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예를 들어, ‘낙엽’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보자. 연이어 연상되는 단어는 가을, 단풍, 산, 산행, 소풍, 책갈피, 연인, 혹은 고독, 우수, 사색 등의 낭만적인 이미지들일 것이다. 그러나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옷깃을 여밀 무렵 길바닥에서 뒹구는 낙엽을 떠올려보라. 이미지가 그대로인가. 아닐 것이다. 낙엽 밟는 소리는 낭만적이지만, 낙엽이 도로 위를 굴러가는 소리는 낭만적이기는커녕 황량할 뿐이다.

맥락의 중요성은 독자의 배경지식과 연결될 때 더 큰 임팩트를 지닌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 상황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를 상상해보자. 그 아이에게 모든 외부인은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람과 동격이다. 그러다가 팬데믹이 종결되고 사람들이 마스크를 벗어버렸을 때 아이가 받을 충격을 상상해보자. 그 아이는 사람들의 코와 입을 난생처음 보고 공포에 떨거나 경악할지도 모른다. 그 아이에게는 처음부터 마스크는 속옷이나 양말처럼 매일 착용해야 당연한 그 무엇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전부 다 바바리맨이 된다면 당신도 경악하지 않겠는가. 한 걸음 더 나아가, 만약 그런 아이에게 마스크라는 소재로 써진 소설을 읽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 분명 팬데믹 이전을 살아본 사람들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될 것이다. 이처럼 배경지식의 차이는 동일한 소재를 정의하거나 해석하는 데에 있어 현격한 차이를 낼 수밖에 없다.

글을 쓰는 연차가 쌓일수록 단어 선정에 있어 나는 점점 더 망설이게 된다. 내가 고른 단어가 합당한 선택인지, 더 적합한 단어가 존재하진 않을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수년간의 읽기와 쓰기 연습으로 분명 어휘력은 더 늘었을 텐데도, 나는 나의 부족한 어휘력을 예전보다 더 자주 원망하게 된다. 그러다가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깨달은 치명적인 실수 하나가 바로 단어와 그 맥락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어떤 특정한 단어를 내가 아는 차원에서만 사용했고 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도 나와 동일하게 해석하고 수용하리라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 역시 때로는 위에 등장한 팬데믹 시절에 태어나고 자라 마스크 착용이 당연하다고 믿는 아이에 불과했고, 또 때로는 그런 아이의 존재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함부로 마스크에 관계된 소설을 강제로 읽히는 폭력적인 어른에 불과했던 셈이다. 나는 나로 가득찬 위선자이자 허세 덩어리였다.

단어의 정확한 사용은 타자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하물며 정확한 문장은 배려를 넘어 나를 넘어설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그 무엇이리라. 정확한 글쓰기는 나를 넘어 남을 향하는 도정에서 만날 수 있는 귀한 열매인 것이다.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를 읽다가 곁가지로 놀랐던 점 중 하나는 글쓰기를 집 짓기에 비유하며 정확한 글쓰기의 중요성을 주장했던 사람은 안정효가 신형철에 한발 앞서 있었다는 사실이다. 누가 먼저 주장했든 나에겐 별 의미 없는 일이지만, 어쨌거나 글쓰기에 있어 베테랑이 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정확한 글쓰기’는 글쓰기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향해야 할 부분이라 믿는다. 그러기 위해 정확한 단어 사용은 핵심이며, 이때의 정확함은 내 안에 갇힐 때에는 표현해내기 불가능하다는 점을 나는 이번 기회에 깨닫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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