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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와 쓰기

목소리 따라가기

가난한선비/과학자 2022. 10. 29. 23:40

목소리 따라가기

한강 작가의 인터뷰 중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소설을 어떻게 써나가냐는 질문에 대해 그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등장인물이 말을 걸어온다고. 그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글을 써나간다고. 처음엔 무슨 말인가 싶었다. 소설 속 등장인물도 결국 작가 자신이 만들어낸 존재에 불과한데, 그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말을 걸고 창조주가 나아갈 길을 인도한다는 게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알 것 같았다. 그건 소설 속 등장인물을 작가 내면의 목소리로 이해하면서부터였다.

글을 써나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한 가지 예로, 위에서 든 예처럼 ‘목소리 따라가기’가 있다. 노래를 부를 때 우리는 귀에 들리는 목소리를 따라간다. 반면, 글을 쓸 땐 마음에 들리는 목소리를 따라간다. 몸의 목소리는 단 하나만 존재하지만, 내면의 목소리는 하나 이상이 존재한다. 글을 쓸 때마다 다양한 톤이 구사되는 이유도, 혹은 동일한 톤이 유지되는 이유도 바로 이 목소리(들)의 존재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한강 작가가 만들어낸 여러 인물들은 각각 한강 작가 내면의 다른 목소리들로 이해할 수 있다. 등장인물의 말을 듣는다는 표현은 곧 작가 내면의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말과 같다. 여러 상황, 여러 사건들 가운데 처한 작가의 일부 자아들이 상상력을 힘입어 여러 목소리를 내게 되는 것이다. 펜을 든 작가는 그 목소리를 받아 쓰기만 하면 된다.

소설뿐만이 아니다. 목소리 따라가기 방법은 모든 글쓰기에도 확장, 적용 가능하다. 비공개, 공개를 떠나 모든 글에는 어떤 목소리가 개입되어 있다.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는 일기 같은 경우엔 그날그날 다른 기분에 따라 여러 가지 목소리의 등장이 가능하다. 어제는 이 목소리였다가 오늘은 저 목소리여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공개를 목적으로 하는 모든 글에는 일관성이라는 개념이 추가로 요구된다. 여러 목소리들이 등장해도 그 중 우세한 한 목소리로 하여금 나머지 목소리들을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차처럼 말이다.

소설 같은 경우, 이 조절과 통제는 등장인물들에게 각기 다른 개성의 목소리를 부여함으로써 해결된다. 이를테면, 극단적인 목소리를 내는 등장인물을 어떤 시점에서 제거해버리거나,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목소리를 내는 등장인물은 처음부터 주인공으로 삼거나 하는 방법을 이용하면 된다. 에세이의 경우는 다르다. 등장인물이 작가 이외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목소리들을 조절하고 통제하기가 훨씬 더 까다롭다. 한 목소리만으로 책 한 권을 구성하기엔 너무 단조롭고, 여러 목소리를 무작위적으로 이용하기엔 너무 산만하게 된다. 너무 진지해도 너무 가벼워도 안 된다. 작은 목소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강약을 조절하며 효율적으로 이용함으로써 독자가 읽기에는 어떤 한 목소리가 가장 우세하게 들리도록 해야 한다. 절제와 유머, 직설과 비유 등, 야구를 비유로 들자면 에세이스트는 직구와 변화구를 자유자재로 던질 수 있는 훌륭한 역량의 투수여야 한다. 이때, 하나의 목소리로 들리지만 실제론 여러 목소리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오케스트라와 같은 글을 우리는 문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작가 내면에 들리는 목소리의 기원은 어디일까. 초보 작가와 베테랑 작가의 목소리는 어떻게 다를까. 내면에 들리는 목소리는 외부로부터 기인한다. 내가 아닌 다른 작가의 글이 내 안의 어떤 목소리와 화학작용을 일으켜 정반합의 변증법적 발전을 거치며 새로운 목소리로 재탄생되는 것이다. 어떤 한 작가의 글을 연이어 읽게 되면 이러한 작용은 심화되고, 심화된 목소리는 내 안의 여러 다른 목소리들과 경합하여 우세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다른 작가의 글을 읽을 때마다 반복된다. 결과적으로 끊임없이 읽기를 지속하는 작가 내면에는 여러 목소리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고, 그것들은 나름대로 위계질서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숱한 반복을 거치게 되면 어떠한 경합에도 흔들리지 않고 우세한 한 목소리가 군림하게 되는데, 독자는 이를 그 작가 자체로 안식하게 된다. 즉, 문체라는 동일한 단어도 초보 작가에게는 글쓰기 과정 중 취할 수 있는 하나의 옵션 정도일지 모르지만, 베테랑 작가에게는 옵션의 의미를 넘어 그 작가와 동일시되는 그 무엇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글쓰기를 연습해본 사람이라면 자기만의 글을 쓰라는 말을 수없이 많이 들어봤을 줄 안다. 혹시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아도 끝내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남아 있진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위에서 소개한 목소리 따라가기의 방법을 충실히 따라해보기를 권한다. 일기도 써보고, 소설도 써보고, 에세이도 써보길 권한다. 먼저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여러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여보고, 그 목소리들을 글로 그대로 옮겨보길 권한다. 그 다음으로는 어떤 한 목소리를 선택하여 나머지 목소리들을 어떻게 조절, 통제할지를 고민하면서 여러 모양으로 시도해보길 권한다. 처음엔 좋아하는 작가, 닮고 싶은 작가의 문체를 모방해도 좋다. 여러 작가를 답습하며 메뚜기처럼 여러 문체를 시도해봐도 좋다. 그러다 보면 자기에게 맞는 목소리를 스스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성실하게 많이 써야 한다. 동시에 여러 작가들의 작품 읽기를 잊지 않고 병행해야 한다. 지난한 과정인 줄 안다. 그러나 글쓰기만큼 정직한 경주도 없다. 성실이 요령을 이기는 몇 안 되는 경주 중 하나다. 이를 믿고 오늘부터 시작해보라. 화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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