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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와 쓰기

읽기는 싫고 쓰고만 싶을 때

가난한선비/과학자 2022. 12. 20. 23:00

읽기는 싫고 쓰고만 싶을 때

읽기는 싫고 쓰고만 싶은 시기를 만날 때마다 나는 점점 더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처음엔 그 시기를 쓰기 신이라도 찾아온 것처럼 맘껏 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매번 그렇지 않았다. 빙글빙글 도는 원 안에 갇힌 기분이랄까. 마치 물은 많으나 정작 마실 물이 없는 홍수처럼 나는 금세 쓰기라는 행위에 갇혀 아무것도 써낼 수 없는 상태로 치닫곤 했다. 읽기도 쓰기도 모두 사라져버린, 죽음의 무풍지대로 진입하곤 했다. 생각해 보면,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재료의 소진이었다. 그리고 내가 목도한 건 나의 가소로움이었다. 수치스러웠다.

기본적으로 나는 읽지 않으면 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기계적으로 글씨를 쓰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모든 글은 저마다의 메시지와 고유성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결국 모든 글은 작가의 생각과 마음으로부터 기인하는 법. 그 안에 무엇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담겨 있는지에 따라 글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먹는 대로 뱉어낼 수밖에 없는 게 모든 살아있는 생명의 기초원리라면, 글을 써내는 숙명을 지닌 작가라는 생명체에게 읽기는 유일한 양식일지도 모른다.

쓰고만 싶을 때의 내 마음가짐을 정직한 렌즈를 끼고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 보면, 렌즈에 맺힌 상은 다름 아닌 허세요, 교만이다. 메시지와 고유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겉멋만 든 자의 가소로움이다. 훅 불면 날아가버릴 먼지 같은 가벼움. 조용히 내공을 쌓아야 할 이유는 여기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적어도 가소로운 글은 쓰지 않기 위해. 글이 가지는 고유한 아름다움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글의 진정성을 오염시키지 않기 위해.

쓰나 마나 한 글은 그 글을 쓴 이에게도 읽는 이에게도 고통을 선사한다는 생각이다. 나는 모든 글은 무언가 한 끝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차이가 그 글의 가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 차이를 독자들이 알아채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그 글을 쓴 작가라면 자신이 만들어낸 그 작은 차이에 대해서 부끄러움과 함께 조용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차이를 풀어내는 과정이 글쓰기 내공을 다지는 과정과 일반일지도 모르겠다.

글쓰기를 처음 시작했을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슬슬 보이기 시작한다. 글쓰기를 정면으로 마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작가의 삶은 자뻑과 좌절의 무한반복으로 점철된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가진 것을 다 뱉어놓고도 더 이상 별 진전이 없는, 마치 빙글빙글 도는 원 안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마침내 들 때면 스스로 조용히 깨닫게 된다. 자기 자신의 가벼움을, 그 가소로움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기서 한 가지 희망을 발견한다. 남이 가르쳐준 가소로움이 아닌 ‘스스로’ 깨달은 자신의 가소로움은 글의 무게와 깊이를 더하는 관문이 된다는 것. 말하자면 자기 객관화의 한 고개를 비로소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다시 깨닫게 되는 건 읽기의 중요성이다. 굶주렸으나 자신이 굶주린 줄도 모르는 허세 덩어리에게 필요한 건 다름아닌 일용할 양식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빈곤한 상태를 깨닫는 것. 글쓰기 여정에서도 피할 수 없는 이정표일 것이다.

뻔해 보이지만 결코 뻔하지 않은 글. 세상에 단 하나뿐인 글. 시공간에 제약을 받아 탄생하지만 시공간을 초월하는 힘을 지닌 글. 너무 이상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작가라면 언제나 지향해야 할 글쓰기 방향이라고 믿는 나는 읽기의 중요성을 쓰면 쓸수록 실감한다. 작가에게 읽기는 유일한 양식이며, 외부의 유입 없이 몸 안에 축적된 에너지만으로는 결코 작가의 여정을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쓰고만 싶은 시기가 가진 위험은 궁극적으로는 글의 소멸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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