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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와 쓰기

공간의 힘

가난한선비/과학자 2022. 12. 18. 12:28

공간의 힘

요즘엔 집중해서 책 읽기가 예전 같지 않다. 작년과 비교할 때 올해 읽어낸 책 수가 절반이 조금 넘는다. 감상문으로 남긴 작품도 마흔 편이 안 된다. 이유를 생각해 보면 미국에서 한국으로의 이사가 가장 큰 몫을 차지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다 설명이 안 되는 어떤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공간의 부재다.

공간으로 탓을 돌린 이유는 이제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미국에서처럼 밤 10시부터 11시 남짓까지는 내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세 가족이 사는 곳은 직장에서 1년 간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기숙사다. 신청한다고 다 가질 수 있는 기회도 아니기 때문에 절묘한 타이밍에 맞춰 운 좋게 입사한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하루에 1만 2천 원만 내면 전기세며 물세며, 구비된 모든 가전기구와 가구, 이를테면 전자렌지, 세탁기, 밥솥, 정수기, 진공청소기, 식탁, 소파, 침대 등을 맘껏 사용할 수 있다. 외국인을 포함한 집 구하기가 어려운 모든 연구자들을 위한 기초과학연구원의 훌륭한 복지제도 중 하나일 것이다.

내가 사용하는 기숙사는 일인실이 아닌 가족실이라 방 두 개, 화장실 두 개를 갖추고 있다. 덕분에 사춘기가 한창인 아들은 혼자 방을 사용할 수 있고, 우린 화장실 하나로 인해 생겨나는 불편함을 겪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밤에 혼자서 읽고 쓰고 하기에 적당한 공간이 부엌과 연결된 거실에 놓인 식탁밖에 없기 때문에 아무래도 온전히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식탁이 항상 깨끗이 치워지지도 않고, 설거지도 매일 꼬박꼬박 하지 않기 때문에 싱크대 바로 옆에 놓인 식탁이 책상으로 전환되기에는 언제나 무리가 있는 것이다.

물론 누군가에겐 배부른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고, 내가 예전처럼 읽고 쓰기에 절박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르며, 여전히 내가 미국에서의 삶의 패턴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떻든 이 문제는 이사를 하게 되면 해결될 것 같다. 곧 이사할 집은 크기는 여전히 작아도 방이 세 개다. 방 하나에는 재독 프로젝트를 위해 마련된 책장 두 개와 책상과 의자와 스탠드가 있다. 2평 정도 되는, 작지만 독립된 공간, 밤 10시부터 자기 전까지 읽고 쓰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있는 것이다. 나에겐 과학자가 아닌 작가로서 온전히 살아낼 수 있는 소중한 시공간이 되리라 믿는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공간의 힘을 생각한다. 공간은 한 사람의 정체성과 결코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요소라는 생각이다. 나는 과학자로서 밥벌이를 하고 있지만, 그건 직장 내에서만 유효한 정체성인 것 같다. 물론 어디를 가도 무엇을 해도 논리적인 원인과 결과를 묻고 따지는 자세를 완벽히 숨길 수 없긴 하지만, 그건 굳이 과학자란 직업을 갖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작가로선 어떤가. 아직은 직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작가라는 정체성은 이제는 엄연히 나의 한 부분이 되었다. 글을 써서 돈을 벌기 때문이 아니다 (참고로 책 천 권 팔아도 저자에겐 백만 원 정도밖에 안 들어온다). 글 읽고 쓰는 일을 사랑하고 어떻게든 지속하는 습관이 몸에 배였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이라 여기는 그 무엇을 위해선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공간은 비가시적인 정체성의 발현 (가시화)과 그 존재를 입증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물리적 공간의 부재는 정체성의 혼란과 그에 따라 이어지는 불안을 야기시키는 요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기숙사 식탁에서 내가 읽기와 쓰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도 얼추 설명해준다. 남편과 아빠가 아닌 작가로서의 정체성으로 전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같은 논리로, 두 평 정도 되는 아늑한 공간이 내게 주는 이 기대와 만족감도 어쩌면 작가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조용히 확인해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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