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읽기와 쓰기

소설을 읽는 이유

가난한선비/과학자 2022. 12. 14. 09:58

소설을 읽는 이유

나에게 한 편의 소설은 하나의 세상이다. 소설을 읽는다는 건 낯선 시공간으로 홀로 떠나는 여행과 같다. 시간을 내어 일부러 익숙한 곳을 떠나는 일은 언제나 부담이 되고 용기가 필요하듯, 이 각박한 시대에 한 편의 소설을 손에 들고 읽어나간다는 건 무모할 정도로 우둔한 짓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든 저항하지 않는다면 두 눈을 똑바로 뜨고도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가 버리는 법. 무용성의 유용성을 믿고, 효율보다는 의미에 무게를 더 두며, 이야기의 힘을 믿는 나는 저항의 작은 몸짓으로, 건전한 도피의 일환으로, 동시에 나와 내가 속한 세상을 상대화하여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하나의 손쉬운 방편으로 오늘도 소설 한 편을 손에 든다. 


서너 권의 다른 책을 동시에 읽어나간 지는 꽤 오래되었다. 아마도 독서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습관일 것이다. 이를테면, 한 권은 신학 책, 한 권은 인문학 책, 한 권은 에세이, 한 권은 소설… 이 조합은 자주 바뀌는 편이지만, 절대 바뀌지 않는 요소는 소설이다. 


소설을 읽으면 낯선 세상 가운데서 익숙한 그 무엇을 발견하게 되고 또 그것을 고대하게 된다. 한 편의 소설이 담고 있는 물리적 시공간은 개별적이지만 그 시공간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인간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그 무엇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익숙한 그 무엇을 깨닫기 위해 굳이 낯선 곳을 떠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내가 아는 인간이란 존재자는 곁에 있는 소중함을 언제나 뒤늦게, 언제나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미련한 동물이기에 미련한 짓에서 조금은 멀어지기 위해 조금은 현명해지기 위해 나는 이러한 여행이 꼭 필요하다고 믿는다. 실제로 여행을 떠나도 좋겠지만 물리적인 제약을 무시할 수 없기에 어지간한 선에서는 신이 우리에게 내려준 상상력이라는 보석 같은 선물을 사용하면 충분하다고 믿는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나에겐 소설인 것이다. 

얼마 전부터 한 가지 걸림돌이 생겼다. 현대 소설보다는 고전 소설을 사랑하는 나는 이미 편향적인 입맛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한 술 더 떠서 이젠 그마저도 아무 책이나 잡고 시작하기가 두려워졌다. 갈수록 점점 더 앞부분을 읽다가 다른 책을 손에 들게 된다. 메뚜기도 아닌 것이 이렇게 여러 책을 껑충껑충 뛰어다니고 있다. 아마도 많은 책을 읽어오면서 나도 모르게 나의 취향이 조금씩 확고해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된다.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걱정이 된다. 이러다가 소설을 읽지 못하게 될까 싶어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지금은 믿고 있지만, 인생이란 게 어디 마음대로 되던가. 나는 그저 그러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러다가 어젯밤 한 책에 안착했다.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이라고 불리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작품이다. 30분 정도에 걸쳐 약 40페이지를 읽었는데, 계속 읽어도 되겠다는, 계속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500페이지가 넘는 묵직한 작품이다. 일주일은 넘게 걸리겠지만, 오랜만에 소설 속 세계로 빠져 보기로 한다. 비록 하루에 한 시간도 떠나지 못하는 여행이지만 말이다. 

우연일까. 내가 메뚜기를 그만두었을 때 마침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러다가 쌓이겠는데…, 하며 잠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침에 일어나 보니 사진에서처럼 아스팔트 위도 하얬다. 덕분에 아침에 출근할 땐 몇 년 만인지 뽀득뽀득하는 소리를 내며 5분을 걸을 수 있었다. 마침내 겨울을 맞이한 기분이다. 부디 운전하는 모든 분들이 안전하길 바란다.

'읽기와 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읽기는 싫고 쓰고만 싶을 때  (0) 2022.12.20
공간의 힘  (0) 2022.12.18
글쓰기 여정  (0) 2022.12.03
완성과 기본  (0) 2022.12.02
연습의 이유  (0) 2022.11.24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