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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와 쓰기

책 그리고 도서관

가난한선비/과학자 2022. 12. 22. 22:54

책 그리고 도서관

미국에서도 도서관은 늘 아들 책 빌리기 위한 장소일 뿐이었다. 직업과 관련되지 않은 분야 (특히 고전 문학)를 영어로 술술 읽어낼 정도로 내 영어 실력이 좋지도 않을뿐더러, 작가로서 나는 아무래도 영어가 아닌 한글을 사용할 것이기 때문에 굳이 영어 공부를 겸해서 영어 문학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었다.

한국 와서도 처음엔 상황이 비슷했다. 그동안 동네 도서관에 여러 번 갔었지만 모두 아들 영어 책만 빌리는 목적이었다. 그러다가 오늘, 정확히 한국 온 지 6개월 반이 되던 날, 처음으로 내 책을 빌렸다. 한국 도서관엔 한국 책이 대부분이라는, 이 당연한 사실을 마치 어려운 수학 문제라도 푼 것처럼 새삼 깨달으며 나는 도서관 문학 코너에 위치한 커다란 책장 사이에서 20분이 넘게 서성거렸다.

서점에 온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중학생 시절 부녀 독서회장이셨던 엄마를 따라 시립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읽던 때가 불현듯 생각이 났다. 오래된 책 냄새와 서쪽에서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살을 등지고 책을 읽던 순간들이 하나둘 떠올라 당황스러웠다. 오후의 긴 그림자처럼 살짝 우수가 깃든, 돌이킬 수 없는 그 순간들이 한 편의 수채화처럼 내 기억 속에 아련하게 살아 있었던 것이다. 감사했다. 내가 마흔이 다 되어 다시 독서를 하기 시작한 것도 어쩌면 이 각인 때문일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운명 같은 기분도 느꼈다.

아빠로서 유일하게 잘했다고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건 나에겐 딱 하나밖에 없다. 바로 베드타임스토리를 아들이 말하지도 걷지도 못하는 나이부터 초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지속했다는 사실이다. 자기 전에 아들에게 책을 읽어주며 아들과 함께 보낸 그 숱한 시간들. 그 시간들이 아들에게도 부디 좋은 기억으로 각인되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보관함에 담겨 있던 책 두 권을 빌려왔다. 도저히 사기가 꺼려졌던, 그러나 꼭 한 번 읽어보고 싶었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1권, 그리고 조지 오웰의 자전소설이라 알려진 ‘파리와 런던 거리의 성자들’. 도서관이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다. 서점에선 몇 분 정도 할 수 있는 일을 도서관을 이용하면 집에서 2주라는 긴 시간 동안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온종일 눈이 오고 낮은 기온에 모든 것이 다 얼어붙은 것 같은 날이었지만, 한국 와서 참 만족스럽다는 기분을 오랜만에 느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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