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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고 따지기, 그리고 답이 되기
김기현 저, ‘욥, 까닭을 묻다’를 읽고
작가이자 자타가 공인하는 글쓰기 선생이자 철학과 인문학에 능통한 목사이기도 한 이 책의 저자 김기현은 2016년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를 쓰며 자신이 통과했던 고난을 자발적으로 재방문하고 그로 인해 다시 아파하다가 끝내 치유를 경험했다. 하박국서를 읽고 묵상하고 해석하고 개별적인 자신의 삶에 적용하면서 자기 객관화를 이루고 초월적인 하나님 관점으로 자기 삶을 관찰, 성찰한 뒤 고난 받은 경험이 있는 모든 인간이 공감할 수 있고 그 고난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은혜와 치유의 열매를 따먹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통찰을 이끌어냈다. 그는 그 시기를 죽음을 경험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때로 고백한다. 아마 그의 책을 읽은 많은 독자들 역시 비슷한 고백으로 화답했으리라.
그랬던 그가 6년이란 세월이 지나고 또다시 고난을 다루는 책을 펴냈다. 왜일까. 왜 또 고난일까. 하박국으로 충분하지 못했던 것일까. 하지 못한 말이 남아서였을까. 아닐 것이다. 고난과 인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인생 자체가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어쩌면 둘은 이름만 다를 뿐 같은 것을 지칭하는 단어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번이 하박국서였다면, 이번에는 욥기다. 하박국처럼 고통을 노래할 수 있게 되었던 그가 이번에는 욥처럼 까닭을 묻는다.
하박국과 욥은 공통점이 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맞이하고 저항하고 항거하다가 결국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고난마저도 노래하며 축복의 통로임을 고백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 역시 또 하나의 하박국이자 욥으로서 자신의 경험담을 매개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견디며 통과한 뒤 그 고난이 벌이나 저주라고 여기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믿음이 감사와 찬송으로 변화되어 거듭난 인생을 비로소 살아내기 시작한 이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은혜가 되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아름다운 증거가 된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재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이 이러한 결론으로만 압축된다면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와 그리 다르지 않은 작품이 되어버린다. 이번 책의 주안점을 나는 제목에서 찾는다. 특히 동사에 주목한다. ’노래하다‘가 아닌 ’묻다‘에서 말이다. 욥의 항변과 무수한 질문을 쏟아내는 모습, 그러니까 알 수 없는 고난을 통과하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복을 받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론적인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고난을 통과하는 과정 중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이 책을 읽어야 전작과 다른 의미를 찾아내지 않을까 한다. 요컨대 노래하는 단계로 나아가기 전, 우리는 먼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묻고 따지는 행위. 유교와 무속신앙이 교묘하게 배합되어 무엇이 예수님의 사상이고 가르침인지조차 묘연해진 한국 기독교에서 이런 행위는 오만방자하다거나 교만하다는 말을 듣기 십상일 것이다. 욥의 세 친구 역할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일 거라고 말한다면 과장이 심한 걸까.
묻고 따지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인생 자체가 고난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다 고난은 인간의 능력 너머에 있는 해결불가능한 영역의 일이기에 모든 인간은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일 앞에서 묻고 따지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이 묻고 따질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묻고 따지면 안 되는 것처럼 암묵적으로 알고 있다. 그들이 범한 우는 단지 묻고 따지기를 금하는 행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 행위 이면에는 자기들만 하나님을 잘 안다는 선민사상과 교만이 내재되어 있다. 욥의 세 친구는 묻지 않았다. 오히려 묻고 따지는 욥을 나무라고 저주하고 가르치려 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의 편을 들어주신다. 묻는 자에게 응답이 주어지는 법이다. 욥의 세 친구가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무시당한 이유는 그들은 묻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신 그들은 자칭 하나님 자리에 앉아 하나님 노릇을 했다. 묻고 따진다는 건 어쩌면 지극히 인간적이고 지극히 겸손한 땅의 존재가 할 수 있는 가장 소박하고도 자연스러운 믿음의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저자도 말하듯, 예수님의 가르침도 많은 부분이 질문으로 이루어진다. 비유와 상징에 능한 예수님의 많은 가르침은 무수한 질문을 낳는다. 욥기의 말미에 등장하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도 질문으로 일관하신다. 그러나 그 질문들이 곧 답이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답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나아가 욥기를 읽는, 아니 모든 하나님 말씀을 읽는 독자들은 이 점을 절대 간과하면 안 되겠다.
또한, 역시 저자가 간파했듯,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묻고 따지는 데에 있어 욥처럼 담대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를 가져야 하지만, 동시에 비그리스도인들 앞에서는 답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제사장 민족으로 부르신 이유와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열방에 제사장 역할,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떻게 된다는 답으로 서기 위해 우리가 먼저 행해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께 묻고 따지는 행위일 것이다. 하나님께 묻고 따지기, 그리고 열방에게 답이 되기. 전자는 후자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열방에게 답이 되지 못할까. 혹시 하나님께 묻고 따지지 않아서이진 않을까. 하나님 말씀을 읽어나갈 때 좀 더 묻고 따지는 자세로 하나님과 대화해야겠다고 나는 마음 먹게 된다.
#두란노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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