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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앞에서 미적대는 인생

나쓰메 소세키 저, ‘태풍’을 읽고

태풍은 아무래도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고, 강렬한 인상을 풍긴다. 그래서 그것이 한 장편소설의 제목으로 선정된 경우라면 독자는 그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나쓰메 소세키는 왜 이 작품 제목을 태풍이라고 했을까.

거센 태풍의 이미지와는 달리 이 작품엔 충격적인 사건이나 상황이 전무하다. 소설이라는 특별한 세계에선 꽤 흔해 빠진 살인, 자살, 치정, 불치병, 혹은 출생의 비밀도 없다. 뚜렷한 위기, 절정, 해소도 보이지 않을뿐더러 전체를 꿰뚫는 스토리텔링도 없다. 작품 평을 하자면 밋밋하다 못해 고요하다고 평할 수밖에 없을 정도다 (한 마디로 재미가 없는 소설이라는 말이다). 단, 이러한 결론은 소설 표면에 드러난 정황으로만 볼 때 그렇다.

그러므로 이 작품 속 태풍의 의미는 등장인물의 외부보다는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실제로도 그렇다. 등장인물의 내적 갈등은 그들의 인생을 대변할 정도로 깊고 치열하게 그려져 있다. 나는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눈도 바로 여기에 머물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품 속 주요 등장인물은 세 명이다. 시라이 도야, 나카노 슌타이, 그리고 다카야나기 슈샤쿠. 모두 문과 출신이다. 시라이는 다카야나기가 학생일 때 이미 교사였던 적이 있을 만큼 연배가 많이 차이 난다. 나카노는 다카야나기와 동기다. 

굽힐 줄 모르는 지조를 문학이라는 학문에 온전히 적용하며 살아온 시라이 도야에게 문학은 곧 삶 그 자체다. 삶은 인간 세상이기에 인간 세상 한가운데에서 치열하게 살아내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자라고 그는 믿는다. 한적한 곳에 여유 있게 앉아 붓이나 놀리는 자를 그는 감히 문학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믿는 대로 생각, 말, 행동에 모순 없이 평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모순 없이 살아가는 그조차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탓일까. 가난은 그의 평생 동반자였다. 가난은 그의 모순 없는 문학에 대한 지조와 같은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근원적이라 할 수 있는 모순을 불러일으켰다. 먹고사는 문제 말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문학자는 가난해야만 하는 걸까. 둘 다 취할 순 없는 걸까.

자발적인 선택으로 흙수저의 길을 당당히 걷는 시라이 도야와는 달리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금수저의 길을 받아들이고 여유 있게 걸어가는 인물은 나카노 슌타이다. 그렇다고 나카노가 철저히 물질적이진 않다. 전형적인 재벌 2세의 모습과도 거리가 멀다. 작품 속에서 나카노는 셋 중 가장 세련되고 사리 분별을 잘하는 청년으로 그려진다. 그는 대학생 때 수재이기도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자발적인 비관주의자이자 스스로 외톨이가 된 다카야나기를 끝까지 챙기는 유일무이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비록 문학에 있어서는 별 열정이 없는 듯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열정 없음의 배경은 곧 그의 재력이라는 것을 독자는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아마도 시라이 도야의 세계관으로 바라볼 때 나카노는 진정한 문학자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돈에 의지하여 세상을 편하게 살아가는 기득권 세력이자 문학을 그 하위에 두고 취미 정도로 삼는 사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정신적으론 시라이 도야와 같은 선상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나카노 슌타이의 여유 있는 삶을 동경하며 둘 사이의 경계에 선 채 스스로를 세상에서 고립시켜 외톨이가 된 인물이 바로 다카야나기 슈사쿠다. 작품은 시라이 도야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다카야나기를 전체 이야기의 중심에 두고 작품을 이해하는 편이 이 작품을 그나마 잘 감상하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 시라이 도야를 중심인물로 삼기에 그는 너무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자고로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왼쪽 어깨엔 검은 악마가, 오른쪽 어깨엔 하얀 천사가 앉아 있는 인물의 갈등이 필수인 법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비록 나카노는 시라이 도야의 정반대에 위치한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다카야나기의 눈에는 충분히 그랬을 법하다. 그의 눈에 시라이는 고고한 문학자, 나카노는 여유 있고 멋진 삶을 살아가는 재력가로 비쳤을 테니까. 비판하면서도 부러워하는 존재가 다카야나기에겐 나카노였을 테니까. 그리고 그는 여전히 젊어서 시라이의 삶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아도 되는 기회가 있었을 테니까.

이 작품은 문학을 넘어서 모든 학문에 적용 가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하다. 학자의 길과 재력가의 길은 결코 정비례 관계에 있지 않다. 물론 훌륭한 학자가 경제적으로 풍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풍족이 학자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은 아마 모든 학자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태풍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아마도 태풍은 순수한 학자의 자세를 견지한 사람만 느낄 수 있는 시대적 흐름, 그중에서도 자본주의 혹은 물질주의를 대표하는, 다시 말해 학문의 순수성을 오염시키고 마치 자본이 학문 위에 군림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하는 시대의 조류를 뜻하는 게 아닐까 싶다. 소설의 말미 시라이가 연설하는 장면에서 이는 도드라진다. 돈을 좇는 사람과 진정한 문학가를 대비시키며 그는 강조했다. 두 영역은 서로 다른 것이며, 절대 돈이 학문 위에 설 수 없다고. 태풍처럼 밀려드는 시대의 조류에 저항해야 한다고. 언젠가는 진정한 문학가의 존재가 돈보다 더 가치 있게 다루어질 날이 도래할 거라고. 

시라이는 과연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진정한 학문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고 나는 조용히 묻게 된다. 시라이의 진정한 문학자를 위한 극단적인 삶의 태도는 자신의 아내에게까지 가난과 궁핍에 시달리게 만들었다는 점은 내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는다. 아내는 문학자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주부인데 말이다. 진정한 학문을 위해서는 아내와 가족이 모두 희생이라고 해야 한다는 말인가. 사실 오늘날 현실을 봐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학자들의 등잔 밑은 상대적으로 밝지 않다. 가족들의 희생 없이 그들의 성공은 불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과학자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러한 질문에 대해 늘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 못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미적대며 오늘 하루를 살아간다. 태풍을 감지했지만 이젠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일까.

*나쓰메 소세키 읽기

1.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453
2.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https://rtmodel.tistory.com/1538
3. 산시로: https://rtmodel.tistory.com/1547
4. 태풍: https://rtmodel.tistory.com/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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