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한 편의 그림이 남는 작품
나쓰메 소세키 저, ‘풀베개’를 읽고
한 작가의 작품을 짧은 기간 다섯 편이나 읽게 되면 문체랄까 사상이랄까 하는 그 작가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충분히 감지하게 되고 익숙해지는 게 보통이다. 심지어 도스토옙스키도 이 일반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전집 읽기를 시도했던 헤세, 이시구로, 루이스도 내겐 마찬가지였다.
처음 예외를 만났다. 바로 나쓰메 소세키다. ‘풀베개’로 그를 다섯 번째 만났다. 그런데 같은 사람이 아니라 다섯 번째 동명이인을 만난 듯한 기분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쓰메 소세키 전집 읽기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이 다섯의 동명이인 중에 나는 다섯 번째 나쓰메 소세키를 소장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지만 새로 구입할 작정이다. 문학작품을 수백 권 읽으니 이젠 어떤 책을 소장해야 할지 나만의 기준이 생기는 것 같다. 참고로 이 기준은 단순한 독자이기보단 작가라는 정체성을 가진 독자로서의 기준이다.
뭐랄까. 한 편의 시화 혹은 그림 속으로 여행을 다녀온 듯한 기분이다. 언뜻 마루야마 겐지의 ‘달에 울다’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것보단 동적이고 스케일이 크다. 헤르만 헤세의 ‘뉘른베르크 여행’ 느낌도 나지만, 그것보단 시적이고 풍류가 넘친다. 또한 이 작품보다 사십여 년 이후에 나온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의 정취도 물씬 풍긴다. 주인공이 일본의 한 시골 온천에 들른다는 점과 거기서 한 여자와 만나게 된다는 점이 닮았다. 이렇다 할 줄거리 없이 서사보단 묘사 위주로 된 뛰어난 작품이라는 점도 닮았다. 특히 자연에 대한 묘사와 그것에 반영된 작가 내면의 투영, 그리고 관조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잘 유지되는 객관적 거리는 내가 이 책을 소장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되어주었다.
‘풀베개’란 제목은 이 작품을 단적으로 대변한다는 생각이다. 태평하다는 인상도 풍기지만, 그것보다는 풍류의 정취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주인공은 도회지인 도쿄에서 속세를 벗어나고픈 충동에 이끌려 비인간적인 결단을 내린 뒤 ‘나코이’라는 해변에 위치한 온천장으로 발걸음을 실제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는 문명의 발달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는 기차에 ‘타는’ 게 아니라 ‘실려가는’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여자의 얼굴에서 찾던 마지막 퍼즐조각 '연민'을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다시 문명 속으로 들어와서야 발견하게 된다는 점에서 아마도 작가는 문명과 비문명의 이분법이 아닌 둘 다를 아우르는 조화를 추구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도 하게 된다. 또한 그는 서양에 대해서도 다소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서양화를 그리는 화공이다 (주인공이 가진 내적 모순이라 할 수 있겠다). 일본인으로서 서양을 절대 우월하다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옹졸한 국수주의자의 모습도 간간이 보인다. 그는 문학에도 조예가 깊은 듯하다. 사물과 사람, 그리고 자연이 만들어내는 예기치 못한 순간들을 예민하게 알아채고 그때마다 즉흥적으로 하이쿠를 짓거나 그림을 그린다. 과연 시와 그림에 능한 인물인 것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기승전결의 구도를 갖는 일반적인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면 한 편의 이야기가 남는 게 아니라 한 편의 이미지가 남는다. 정유정보다는 한강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이미지가 썩 마음에 든다. 한 편의 책을 읽고 나면 한 편의 그림이 그려지고 그것이 오랫동안 은은한 잔상으로 남게 되는 작품. 나도 언젠간 이런 느낌의 작품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과연 나는 독자에게 어떤 그림을 그리게 하고 싶은 걸까.
*나쓰메 소세키 읽기
1.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453
2.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https://rtmodel.tistory.com/1538
3. 산시로: https://rtmodel.tistory.com/1547
4. 태풍: https://rtmodel.tistory.com/1549
5. 풀베개: https://rtmodel.tistory.com/1555
#현암사
#김영웅의책과일상
'김영웅의책과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지우 저, ‘고전에 기대는 시간’을 읽고 (0) | 2023.02.24 |
---|---|
김기현 저, ‘욥, 까닭을 묻다’를 읽고 (0) | 2023.02.16 |
정여울 저, ‘헤세로 가는 길’을 읽고 (0) | 2023.02.09 |
나쓰메 소세키 저, ‘태풍’을 읽고 (0) | 2023.02.02 |
나쓰메 소세키 저, ‘산시로’를 읽고 (0) | 2023.01.30 |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