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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오스트리아 빈 (비엔나) 나들이

가난한선비/과학자 2023. 3. 23. 23:40

오스트리아 빈 (비엔나) 나들이

첫째 날 오후

‘완벽한 하루’란 의도하지 않은, 아니 오로지 바라기만 할 수 있는, 아니 예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으로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나는 나의 첫 유럽, 오스트리아 빈에서 내게 주어진 제한된 시간을 일부러 듬성듬성한 계획으로, 절반 이상은 무계획에 가까울 정도로, 가득 채웠고, 꿈만 같은 순간들을 경이와 감사로 맞이할 수 있었다.

공항을 빠져나와 오스트리아 땅에 내 두 발이 처음 닿았을 때 나를 반겼던 잿빛 하늘을 기억한다. 12년 전 처음 클리블랜드에 발을 디딜 때 느꼈던 그 음울한 하늘이었다. 기억이란 요상하다. 언제나 기억하고자 하는 바람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새 장기 기억 저장소에 자리잡고야 마는 것이다. 궁금해진다. 나의 오스트리아는 과연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될까.

이튿날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미세먼지가 많아 청명한 하늘을 보기 어려운 한국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잠시 탈출한 기분이랄까. 해방감을 느꼈다. 익숙했던 캘리포니아의 하늘과도 달랐다. 유럽의 하늘은 유럽만의 정취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업무를 마치고 우린 하늘의 축복을 등에 업으며 나들이를 나섰다 (여행이라는 단어는 다소 퇴색된 느낌이라 뭔가 전투적인 뉘앙스가 강한 반면, 나들이는 여전히 내게 가벼운 마음과 여유를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호텔로부터 8킬로미터. 보통 걸음으로 쉬지 않고 걸으면 1시간 40분이 걸리는 거리. 그러나 우리는 효율적이지 않을뿐더러 무모하게까지 느껴지는 방법, 즉 도보를 택해 쇤부른 궁전을 향했다. 쇤부른 궁전을 나는 목적지라 부르고 싶지 않았다. 내겐 그저 반환점일 뿐이었다. 그곳까지 걸으며 보내는 모든 시간과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거치는 모든 길과 장소가 나의 목적지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유명 관광지에 가서 사진 몇 장 찍고서 거기 가봤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 흔해빠진 위선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오스트리아를, 그 지역을 피부로 느끼고 싶었다. 눈과 귀를 열고, 마음까지도 열고 나는 모든 과정을 즐기고 싶었다.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그 시간 그 장소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취를 담아내고 싶었다. 바로 그 과정에 필연 같은 우연이 깃들기 때문이었다.

하늘을 제외하고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빽빽이 들어선 건물이었다. 우린 가벼운 발걸음으로 유럽의 건축양식이 녹아있는 건물들로 둘러싸인 길을 오후 내내 걸었다. 건물은 거대했고, 높이도 거의 일정했으며, 주로 많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건물 사이의 간격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마치 한 골목이 거대한 레고블럭들의 연결 같아 보였다. 골목의 모퉁이를 이루는 건물과 중간을 이루는 건물들은 서로 다양한 색과 정교한 장식으로 차이를 내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나도 드디어 유럽의 거리를 걷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가슴이 설렜다. 그러나 삼십 분 정도 비슷한 거리들을 연이어 걷다보니 내 눈은 금세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에 민감할 수 없었다. 단 삼십 분 만에 관광객에서 거주민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경이는 새로움을 보는 눈의 부재 시 느낄 수 없는 그 무엇일 것이다.

트램이 일상화되어 있는 거리가 낯설게 다가왔다. 편도 2.6유로. 한국 돈으로는 3,500원 정도 했는데, 탈 때 표를 제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일단 타고 나서 트램 안에 있는 자동화된 기계로 각자 알아서 표를 구입하는 방식이었다. 가끔 표를 검사하기도 한다는데, 지금까지 세 번 타봤지만 한 번도 표 검사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알아서 법을 지키는 선진국 다운 모습이 아닌가 싶었다. 갑자기, 출근 시 아침마다 버스정류소에 병렬로 서서 먼저 타서 자리를 잡기 위해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을 하는 한국 할머니들의  모습이 떠올라 움찔하기도 했다.

미국엔 식료품을 살 수 있는 마트가 여러 이름으로 존재한다. 한국의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 GS후레쉬 같은 곳들이다. 비엔나엔 BILLA라는 마트가 거의 도배하고 있는 듯했다. 10킬로미터 이상을 걸으며 적어도 5개 이상의 BILLA를 봤으니 말이다. 우린 그곳에 잠시 들러 그 지역에서 수확한 과일과 물을 구입했다. 관광객으로서 여행을 풍성하게 즐길 수 있는 한 가지 팁은 주로 거주민들이 이용하는 장소에 의도적으로 가 보는 것이다. 로컬 마트에서 로컬 푸드를 사서 먹어보는 경험은 이에 큰 도움이 된다.


반환점에 이르기 위해 중간 지점에서 우린 점심을 먹었다. 푸드트럭에서 파는 케밥으로 입맛을 다시고, 바로 앞에 위치한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즉흥적으로 당기는 음식 몇 가지를 주문해서 나눠 먹었다. 전혀 계획에 없었던 음식점, 어떤 메뉴가 있는지조차 몰랐던 곳에서 우린 기대 이상의 맛과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예상치 못했던 축복이었다 (사실 다른 날, 맛있어서 유명하다고 알려진 곳에서 먹었던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가격까지 저렴했다).


쇤부른 궁전에서 음성안내를 받으며 구경했던 수십 개의 방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었다. 내 눈엔 아름답고 화려한 건물과 장식만 보인 게 아니었다. 그 이면에 숨은 부와 권력의 과시와 세습, 그리고 그 안에 깃든 인간의 욕망과 허영이 느껴지기도 했다.


저녁은 현악 3중주의 공연 관람으로 마무리했다. 많이 걸었기 때문인지 살짝 피곤하기는 했지만,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서 클래식 공연을 본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내겐 의미가 컸다. 꽤 앞자리에 앉아 관람해서인지 연주만이 아니라 연주자의 움직임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두 번째 날 오후


다음날 들른 벨베데레 궁에서는 미술 작품을 많이 구경할 수 있었다. 특히 오스트리아 출신 미술가인 구스타프 클림트의 여러 작품들을 구경할 수 있었는데, 우리에게는 ‘Kiss’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화가였다. 입체의 평면화 등 사실적이지 않은, 다소 인간과 사물의 이면을 그려내고자 했던 화가로 대충 알고 있었는데, 그의 여러 작품들을 살펴보니 내 지식은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완전 사실주의적인 그림도 그렸으며, 점묘화 같은 방식으로 자연을 많이 그리기도 했던 화가였던 것이다. 작품이 걸려있는 여러 방 중에서는 클림트에게 영향을 주었던 화가들, 고흐나 모네의 작품들도 걸려 있었다. 대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엔 다른 대가들의 영향과 그들 사이의 교류가 중요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좋은 씨는 좋은 토양과 만날 때에만 괄목한 만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벨베데레 궁에 가기 전에 잠시 들렀던 성 슈테판 성당이 내겐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성당의 크기와 정교함 모두 압도적이었다. 실내에 들어가서 느꼈던 성당 특유의 느낌은 높은 천장이 주는 거대함과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의 향연은 물론 곳곳에 장식된 그림과 조각들로 인해 저절로 경건한 마음이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우린 넋이 나간 채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음식이라고 하는 슈니첼, 타페슈피츠는 내겐 기대 이하였다. 한국에서 먹던 왕돈까스가 슈니첼보다 나았고, 갈비탕이 타페슈피츠보다 몇 배는 맛있었다. 단, 맥주는 기억에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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