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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슈테판 대성당

가난한선비/과학자 2023. 3. 26. 12:19

오스트리아 빈 (비엔나) 나들이
: 사진 속 단편들 #4


높은 천장은 사람을 낮아지고 겸허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나이아가라 폭포나 그랜드캐년을 앞에 두고 자신의 외소함, 아니 존재의 가소로움을 느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형식은 내용을 만들기도 유지하기도 강화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내용 없는 형식은 껍데기일 뿐이지만, 내용을 담지한 형식은 내용을 완성한다. 형식을 내용과 분리시켜 비난하고 악마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내용의 부재로부터 상처받은 몸부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창조주이자 구속자로 믿고, 예수를 참 왕, 참 선지자, 참 제사장의 삼중직을 모두 담당하신 그리스도, 나의 구원자, 나의 주인으로 믿으며, 지금도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비록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신뢰하기로 작정한 나는 늘 참 예배에 갈급하다. 나는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며 세상 속에서 세상과 다른 백성으로서 그 나라를 살아내길 원한다. 가치관의 변화를 겪고나서 다시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던 곳은 엘에이에 위치한 성 제임스 성공회당이었다. 처음 하나님을 믿게 될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그때 그 상황을 이성적으로 기억하지 못한다. 믿음이란 것 자체가 반이성적이진 않지만 비이성적 혹은 초이성적인 속성을 가지기 때문에 나는 그 당시 다시 내 안에 하나님을 향한 무언가 뜨거운 것이 느껴져서 당황스러우면서도 무척이나 안심이 되었다. 많은 것들에 실망하고 점점 무뎌져가던 나에게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살아 꿈틀대고 있다는 사실이 내심 반가웠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내 신앙이 한 번 더 성숙해지는 시기였다. 지금도 기억한다. 성제임스 성공회당의 높은 천장. 여러 조각과 그림들. 누구나 나와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던, 제단 앞의 풍경. 나의 교만함은 순간 증발되었고 나는 온몸을 숙이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

슈테판 대성당 안에서 내가 마주한 건 사제도 관광객도 아니었다. 4년 전 성제임스 성공회당에서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내 모습이었다. 나는 다시 작아졌고 크신 하나님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관광지 같은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지만, 나는 다시 경건한 예배자의 마음이 되었다.

형식 없는 내용만이 진짜라고 믿는 건 신화일지도 모른다. 내용 없는 형식과 형식 없는 내용은 모두 불완전하다. 이성을 사용할 수 있지만 결코 이성적으로 살아가지 않는 인간의 속성을 이해한다면, 그리고 인간은 생각하는 대로가 아니라 습관대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걸 이해한다면, 결코 내용과 형식 중 하나만 중요한 것처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내용을 담지한 형식, 내용을 완전하게 만들어주는 형식. 나는 점점 더 형식의 아름다움과 중요성을 깊이 숙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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