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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박명

가난한선비/과학자 2023. 10. 25. 08:41

박명

‘트와일라잇 (twilight)'으로 더 잘 알려진 박명은 해뜨기 전이나 해 진 후 빛으로 밝은 상태를 의미한다. 그 시간은 길지 않다. 곧 해가 뜨거나 어둠이 찾아온다. 노을이 자주 동반되는 이 시간은 낮과 밤의 경계에 해당한다.

어릴 때부터 이 시간을 동경했다. 해뜨기 전에 밖이 환해진다는 사실이 내겐 신비할 정도로 낯설고 놀라운 일이었나 보다. 여전히 어두운 시간, 나는 조용히 집을 나서곤 했다. 동네 뒷산에 올라 일출을 보기 위해서였다. 오르다 보면 주위가 금세 환해졌다. 그러면 나는 마음이 조급해진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침내 정상에 올라 기다렸던 일출을 볼 땐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저 집에 가야 할 시간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그때 내가 기다렸던 건 일출이었지만 나와 함께 하고 누렸던 건 박명이었다. 점점 밝아져 가는 순간들을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환희와 경이에 찬 채 걷고 또 걸었던 것이다. 가끔 구름이 많아 일출을 잘 볼 수 없어도 상관없었다. 일출은 반환점을 의미할 뿐이었다. 나아가, 일출은 박명을 사라지게 하는 주체였다.

머리가 크고 또 나름대로 인생의 낮은 점을 경험하면서 과정이 갖는 소중함에 눈을 뜨게 된다. 목적이나 목표라고 부르는 것들의 의미에 대해 다시 묻게 되고 재해석을 하게 된다. 어릴 적엔 그곳으로 향하는 길이 직선 코스라고 믿었다. 그런 믿음으로 가꿔진 길이 인생인 사람도 소수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목표에 가까워졌는지가 인생을 잘 살았는지 가늠하는 성공의 지표가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않다. 한때 세웠던 목적은 하나의 이정표가 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어릴 적의 목표가 변하지 않고 전 인생에 유효한 사람은 자신이 받은, 자신의 노력과 열정과 역량보다 훨씬 더 큰 축복이 (이를 운이라고도 부른다) 뒷받쳐 주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겸허히 살면 될 것이다.

어릴 적 내가 동네 뒷산에 올랐던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아마도 일출을 보기 위해서라고 말할 것이다.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지만 전부는 아닌 대답이다. 이제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새벽에 산을 올랐던 이유는 박명을 즐기기 위해서였다고, 빛의 그라데이션을 느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일출은 그저 집으로 돌아가라는 반환점 같은 역할일 뿐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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