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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자기중심설

가난한선비/과학자 2023. 10. 26. 09:31

자기중심설

어떤 분야에서 인지도가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를 즐기며 그곳을 삶의 바운더리로 삼는 사람들. 거기에서 삶의 이유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고, 나아가 점점 견고해지는 자기애에 빠지는 이들을 보며 ‘고인 물’이라는 단어 만큼 적절한 표현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고 보면 고인 물이란 표현은 능동태가 아닌 수동태다. 어느 날 보니 자신이 고인 물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영원히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상석에 앉길 즐기는 사람들, 대접받길 좋아하는 사람들 중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이들 역시 수동태의 삶을 살고 있다면, 다시 말해 흘러가는 대로, 살아온 대로 살아간다면, 이들의 삶을 본받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대단하다며 박수 쳐주고 잊으면 될 일이다.

그렇다면 능동태의 삶은 어떤 것일까. 나는 저항이라는 단어에서 답을 찾는다. 저항하는 삶. 저항의 대상은 일차적으론 습관이나 관습일 수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대상은 그것을 넘어선다. 그것들의 이면이라고 볼 수도 있고 본질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말하자면 자기애 혹은 자기중심성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중심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성악설이나 성선설은 자기중심설의 양극일 뿐이다. 선한 모습도 악한 모습도 자기중심적인 행동의 발로라면 그것들은 충분히 저항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고의 적은 자기 자신이라는 말도 이 생각의 연장선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저항하는 삶이란 더 이상 상석에 앉는 자들처럼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수동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승자독식과 약육강식의 논리를 옹호하며 자기 유익만을 쫓는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의 높낮이에 상관없이 퍼져있기 때문이다. 나의 이야기도 되고 당신의 이야기도 된다는 말이다. 참고로, 승자들만 승자독식 혹은 약육강식을 옹호한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류다.

그런데 여기에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 자기중심성을 알기 위해선 자기객관화가 되어야 하는데, 바로 이 단계까지 진행하는 사람이 의외로 적다는 사실이다. 즉 앎의 부재. 무지다, 무식이다. 적을 알아야 싸우든지 말든지 할 텐데, 적을 모르니 싸울 수가 없다. 내가 볼 땐 우리 인간이 당면한 가장 큰 딜레마 중에 하나가 아닌가 한다. 자기객관화가 요원하고도 시급하고도 절박한 문제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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