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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장악한다는 것

가난한선비/과학자 2024. 1. 22. 15:31

장악한다는 것

넓은 공간보다는 적당히 좁은 공간에서 나는 아늑함을 느낀다. 집중해서 글을 읽거나 쓸 때에도, 심지어 잠을 잘 때에도 나는 적당히 좁은 공간을 선호한다. 아마도 그럴 때마다 내가 느끼는 건 그 공간을 장악했다는 기분일 것이다. 

장악한다는 것. 이는 익숙해진다는 것과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적극적인 느낌이다. 익숙해지는 건 수동적으로도 가능하지만, 장악한다는 건 그럴 수 없다. 좀 더 능동적이어야 한다. 내가 그 공간에서 무엇인가를 해내야 한다는 조건이 붙을 때 더 그렇다. 집중은 마음이 불편하면 불가능하기 마련이다. 어떤 공간에 들어설 때 우선 마음이 편해야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다. 

또한 익숙해지는 게 시간에 따른 개념이라면 장악한다는 건 공간에 대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수동성은 전적으로 내가 개입하지 않는 상태, 그러나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상태, 즉 시간의 절대 권력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이 없어도 익숙해질 수는 있지만 그 모든 익숙한 것들을 장악할 수는 없다. 장악한다는 건 어떤 공간을 내 영역으로 만드는 적극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 한 가지는 처음 가 보는 곳에서도 나는 종종 마치 내가 익숙하고 이미 장악한 것처럼 그 공간을 느끼곤 한다는 사실이다. 왜 그런지는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남는 건 언제나 느낌, 기분, 경이일 뿐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실재다. 

그렇다면 익숙해짐은 장악한다는 것의 전제조건이 될 필요가 없다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해, 익숙하지 않아도, 낯설어도 그 공간을 장악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모든 적당히 좁은 공간이 다 이런 것도 아니다.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내가 장악했다고 여기는 공간이 어떤 공간인지, 단지 나의 주관적인 판단인지, 단지 그날의 기분에 의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내가 장악하는 게 아니라, 그 공간이 나를 장악하는 건 아닐까. 내가 그 공간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그 공간이 나를 선택하는 건 아닐까. 

정답은 영원히 모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늘 바라게 된다. 내가 장악했다고 여기는 (실제론 내가 장악당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공간을 살면서 계속 만나기를. 마침내 내가 있을 곳이라고 믿게 되고, 마음 깊이 평안을 느끼며 무언가를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내게 주어지기를. 내가 그 공간에 머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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