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in faith

빛을 비추는 일

가난한선비/과학자 2016. 1. 7. 00:21

그동안 난, 길거리에 나가거나 어떤 특정한 사람을 만나서 참된 복음을 전달했을 때 우리를 피하거나 우리에게 욕을 해대는 사람들의 반응이 핍박인 줄 알았다. 그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한통 속으로 몰아넣어 비겁한 이중적인 사람들의 단체로 말하는 사람들이 핍박자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거짓에 기반한 세상 권세 잡은 자들로부터 부당한 대우와 차별을 통한 멸시와 천대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 전도자들이 맡은 바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 경험할 수 밖에 없는 참 핍박과 고난임을 깨닫는다. 


빛은 빛들이 모인 조명상사에만 머물면 그저 자기 모양새와 기능에 모든 관심이 기울어져 물건을 사러 온 사람들로부터 선택받기만을 바라는 법이다. 그러나 단 하나의 약한 빛이라도 어둠에 놓이게 되면 비로소 원래의 기능에 충실하게 된다. 빛은 어둠을 물러가게 하는 근원이기 때문이다. 


전도는 어둠에 빛을 비추는 것이라 했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는 마치 약간의 외로움만 견뎌내면 쉽게 지속할 수 있을 것처럼 쉽게 들릴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어떤 이들은 아직 빛을 어둠에 비춰본 경험이 전무한 사람들일 것이다. 


깜깜한 어둠에 혼자서 빛을 비춰본 적이 있는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외로움은 물론이며, 전혀 예상할 수 없었고 전혀 원하지 않았던 어려움에도 쉽사리 노출되는 경험 말이다. 마치 아무도 날 보호해 주지 않는 것 같이 철처히 혼자 내버려진 것 같은 느낌. 지속해야 할지 그냥 그만 둘지, 이러한 선택의 기로에 어이없게 너무나 빠른 시간 내에 놓이게 되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내가 이런 걸 기대한게 아닌데... 하는 생각에 빠져 본 적이 있는가. 급기야는 내가 아직 부족하니까 좀 더 훈련을 받고 나서 다시 시작해야지... 하는 자기 합리화에 빠져 결국 STOP 버튼을 눌러버린 경험이 있는가.


빛이 혼자 어둠 속에 덩그러니 놓이게 되면 어둠이 가만히 있을 줄로만 알았던가. 자신의 의지와 감정은 전혀 상관도 없이 자신 안에 있는 성령만 혼자서 외로이 모든 걸 감당하실 줄로만 알았던가. 성령이 모든 것을 인도하시는 것은 100% 옳지만 그것은 내 의지와 감정을 마치 로보트처럼 지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걸 몰랐던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가 성령의 인도에 부합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방법이라는 걸 몰랐던가.


빛이 혼자 어둠에 놓이게 되는 것은 처절한 영적 싸움, 아니 영적 전쟁이다. 조명 상사에 있는 전등과는 달리 우리 그리스도인 전도자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빛이다. 그리고 어둠의 세력, 사단은 그 생명만을 노리며 창세 전부터 존재했던 우리들의 대적이다. 전등이야 생명이 없기 때문에 어둠에 놓아두면 그 수명이 다할 때까지 아프지도 않고 기분 상하지도 않고 빛을 밝히겠지만, 우리들은 생명이 있기 때문에 빛을 밝히는 매 순간마다 어둠을 느끼고 그에 반응해야만 한다. 그런 처절한 싸움이 바로 빛을 밝히는 일의 정체다.


그리고 그런 처절한 싸움은 비단 오지에 선교사로 파송된 전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평범한 직업을 가진 우리들 역시 평신도 선교사의 직분을 받았기 때문에 가정에서 일의 현장에서 그런 싸움에 맞닥뜨리지 않을 수가 없다. 바로 이 때 위에서 언급한 부당한 대우와 차별을 받게 되는 것이다. 모든 부분이 그렇진 않지만 성경에서 배운 대로 현장에서 그대로 살아가려고 실천하게 되면 다수의 집단에 거스르는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주어진다.

물론 아직까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전도자들이 그런 상황에서 그 다수의 집단의 내규에 스스로 타협을 자처하여 그 집단에 거스르지 않는 것을 택함으로써 싸움을 피하고 있다. 즉, 결국 성경에서 배운대로가 아니라 세상에서 이미 시스템화되어 있는 질서에 맞춰가고 있는 것이다. 거스르는 건 불협화음을 내는 것이니까 복음적이지 않다는 합리화와 함께.


나는 이러한 안타까운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욕을 먹을 일을 자처하고 있다고 본다. 기독교를 개독교라고까지 말하는 이 풍토는 그 다수의 집단이 만들어 낸 게 아니다. 그것을 만들어 낸 장본인은 바로 위와 같이 이중적으로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들이다. 교회에서는 거룩하게 생활하다가 교회 밖, 일의 현장에서는 완전히 불신자와 똑같이 살아가는 이중적인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 자신이었음을 우린 담백하게 시인해야 한다.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이중적인 삶이 아닌 성령이 탄식하지 않으실 삶을 우린 살아가야만 한다. 그것이 내가 이해하고 있는 기독교의 참모습이고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성령이 역사하여 전도가 되어지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는다.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자들이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면 누가 믿겠는가. 전도는 설득이 아니지 않은가.


성경에서도 남은 자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늘 다수가 아닌 소수였다. 하나님이 쓰신 일군은.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은 다수를 사용하시기 싫어하신다고 이해하면 오산이다. 소수만 존재했기 때문에 소수를 사용하신 것이라고 이해해야만 한다. 다수는 늘 이중적이거나 어둠에 속해 있거나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자, 늘 한결같아서 그 사람을 보면 예수님이 보이는 사람을 사용하신다. 나는 오늘도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중적인 야누스의 가면을 벗어버리길 기대한다. 혼자서 물결을 거스르면 죽을 수도 있고 너무나 처절한 상황에 놓이면서 힘들 가능성이 높지만, 혼자가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가 그 혼자를 뒷받침해주고 격려해 주고 함께 거스른다면 훨씬 쉬울 것이다. 그 날을 꿈꾼다. 참된 혼자가 모인 참된 공동체가 생겨날 그 날을. 그리고 난 그 참된 공동체의 멤버인 참된 혼자가 되기를 자처한다.



'in fai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뢰  (0) 2016.03.25
함몰 웅덩이 증후군  (0) 2016.01.13
기적  (0) 2015.12.22
왕이 잠이 오지 않아  (0) 2015.05.01
전적인 신뢰의 기도  (0) 2015.04.30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