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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faith

믿음과 신뢰

가난한선비/과학자 2016. 7. 12. 05:22

어떤 것이 신뢰할만하다는 논리/과학적인 입증이 이루어진 후에야 비로소 믿을 수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과는 거리가 멀다. 먼저, 믿음과 신뢰의 순서가 뒤바뀌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신뢰는 믿음 이후에 체득해 나갈 수 있는 열매이지, 믿음을 갖기 위한 근거/조건/이유가 아니다. 우린 물리학적인 중력의 법칙을 믿는다. 왜냐하면 어린아이조차 중력이 무엇인지 설명만 해준다면 일상에서 자신이 중력을 늘 체험하고 있고 그 힘에 제한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직접 체험했고 남들도 체험했으므로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고, 이러한 사실이 인간에게 신뢰를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객관성이 결여된다면 신뢰는 불가능하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이 사회에서 배운 믿음과 신뢰의 개념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뢰의 개념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복음을 받아들이는 믿음의 반응을 통해 영적 신분이 바뀐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구별된 체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하나님 자녀들 안에는 성령이 함께 거하시고 인도하신다. 물론 구원과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가 구원받은 이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원받으면 성령이 자기를 강제로 이끌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은데, 미안하지만 구원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성령의 인도를 따르거나 거부할 의지는 사라지지 않고 존재한다. 쉽게 말하자면, 성령은 bossy하지 않다. 오히려 조용한 가운데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의 뜻을 낮은 목소리로 말씀해 주신다고 해야 더 정확할 것 같다),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들은 일상에서 늘 존재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더 복잡해졌다거나 더 어려워졌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오로지 내 유익에만 좌지우지되던 선택의 기준에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라는 기준이 추가 ('추가'이지 '치환'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는 마치 치환인 것처럼 두 개의 기준이 하나로 통일될 수 있도록 우린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만약 '추가'가 아니라 '치환'이라면, '순종'이라는 단어는 필요가 없게 된다. 구원은 과거 기억 강제 삭제 수단이 아니다)됨으로써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것이 옳은지 난감해지는 것이다. 순종이라는 개념을 하나님 자녀 안에만 존재하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의 자유의지를 맞추는 행위라고 정의한다면, 결국 하나님 자녀들만 성령의 인도에 순종할지 안 할지에 대한 인생에서 새로운 고민이 생겨나는 셈이다. 구원받았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그 성령의 인도하심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의 상처나 어떤 특정한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기로 결단하고 구원을 받았더라도, 한동안은 옛 자아, 즉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쫓게 된다. 이것은 마치 관성의 법칙과도 같다.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은 사건이 영적인 의미에서는 일생일대의 가장 큰 의미를 가질 수 있겠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그것은 한번의 격한 사건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 사건을 겪기 전의 세월 (길게는 몇십년)동안 별로 의심해 본 적 없던 자신의 선택의 기준과 패턴을 그 사건 이후에야 비로소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한번도 들어본 적 없던 음성을 듣게 되기 시작했으니 (그것도 내면에서부터) 그 동안 굳어져온 가치관의 패턴에 혼란이 오는 건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했지만 (즉 믿음을 시작했고 신뢰의 관계를 시작할 수 있는 문을 통과했지만) 여전히 이러한 상태는 신뢰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엔 아직 이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보통 하나님이란 존재는 그저 자신이 죽으면 천국에 보내주는 절대자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구원은 그냥 죽어서 천국 가는 티켓 정도의 의미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구원받기 전부터 유지해 온 '나의 왕국'은 조금도 꿈쩍하지 않는다. 그렇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신뢰가 생겨나는 것은 나의 왕국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그리고 그 시기는 내가 나의 자유의지를 성령의 인도하심에 방향을 맞추는 순종이라는 행위를 하기로 결단하고 실행에 옮긴 시기와 일치한다. 놀라운 것은 그러한 순종이라는 행위로 말미암아 신뢰는 점점 탄력을 받아 성장하게 되는 상태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신뢰는 믿음이라는 옷을 입고 그 옷에 맞는 삶을 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시작이 되는 것이며, 그러한 삶의 지속은 신뢰를 더욱 깊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번엔 조금 듣기에 거북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겠다. 먼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 받는 것이 믿음이라고 할 때, 그 신뢰를 성장시켜가는 것은 순종이라는 것을 상기하자. 물론 복음을 받아들인 것 자체가 첫 번째 순종이라고 한다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두 번째 순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첫 번째 순종과 두 번째 순종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간격은 개인마다 천차만별일 것이다. 유일한 길 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더 이상 나쁜 일은 생기지 않아야 하고 아프지도 말아야 하며 자신의 실수나 과오도 모두 스스로 책임지지 않아도 되며 자신의 소원이 성취되고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부적신앙 (기복신앙)의 소유자는 안타깝게도 두 번째 순종이 첫 번째 순종보다 훨씬 더 어렵고 어쩌면 육신을 입고 있을 때 경험해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구원은 받았지만 여전히 성경과 예수님의 핵심 사상이었던 하나님나라를 일상에서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안타까운 경우가 되겠다. (여기서 그 사람이 진정 구원을 받았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생략하자. 단, 한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 밖엔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는 것이다. 우린 그저 유추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반대로 두 번째 순종이 첫 번째 순종 이후에 당연히 따라오게 되는 열매가 아니냐면서 그 둘 사이의 시간 간격을 경험해 보지 못하고 하나님나라를 구원받자마자 누리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두 경우가 생기게 되는 원인을 여기서 많은 분량을 할애하며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래 봐야 모든 사람의 고개를 끄덕이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여기선 생략하도록 한다. 다만, 하나님이 후자를 더 사랑하셨다거나, 후자가 전자보다 더 훌륭히 준비된 사람이었기 때문은 아니라는 점만 밝혀두자.


다시 요지로 돌아가서, 두 번째 순종이 쉬운 게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살펴봤다. 다음은 아마 후자나 전자의 경우가 아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하나님 자녀가 겪는 패턴이 아닐까 한다. 두 번째 순종에 이르는 사람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자신의 왕국이 어쩌면 처음으로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는 순간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인생에서 처음으로 실패라는 것을 경험하는 순간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마치 아버지 곁을 떠났다 돌아온 두 번째 아들의 경우를 떠올리게 한다. 이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 곁을 잠시 떠날 때에도 아들이라는 신분이었고, 다시 돌아왔을 때도 아들이라는 신분은 변함이 없었다. 이 두 번째 아들에게 아들이라는 신분은 믿고 안 믿고의 차원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당연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는 것이 구원이라고 한다면, 이 두 번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온 것은 두 번째 순종이라는 개념과 대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아들은 돌아왔을 때에야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할 수 있었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처음부터 이 아들은 아버지를 신뢰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지만 (떠나기 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다가 한번 인생의 실패를 처절하게 맛보고 나서야 (돌아온 후) 아버지를 신뢰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아버지께 전적인 순종을 하는 신뢰의 관계를 가질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비록 방황과 실패라는 과정을 겪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론 두 번째 아들은 어쨌거나 신뢰의 관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때론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이 가장 빨리 제자리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 어쩌면 그런 사람들에게는 방황하는 기간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위한 가장 빠른 지름길이며 완벽한 길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올바른 결과가 나왔을 때에 국한해서 방황했던 과거를 재해석하는 것이지, 절대로 인과응보적인 관계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동일하시고 실수하지 않으시지만, 개개인을 모두 다르게 지으셨고 그에 맞게끔 응답하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온 우주를 경영하고 계신 동시에 개개인의 사소한 일에까지 관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과 순종의 개념은 세상에서 말하는 그것들과는 순서를 포함하여 많이 다르다. 하나님을 믿고 싶지만 아직 신뢰할 만한 근거가 부족해서 감히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을 만나봤다. 창조/진화론과 같이 여전히 깔끔한(?) 결론이 나지 않은 사안이나, 예수님의 착하고 겸손하시고 바른 행동은 본받고 싶은데 도저히 동정녀 탄생이라든가 부활이라는 것들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면서, 나름대로 겸손의 표현으로 나중에 좀 더 준비가 되면 믿기 시작할 거라고 말해주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그렇다면 이번엔 반대로 이미 두 번째 순종을 지나 일상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과연 창조/진화, 동정녀 탄생, 부활에 대해서, 과연 믿지 않는 사람이 들어도 금방 이해가 갈 정도로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답을 가지고 있을까? 답은 Definitely No. 전혀 아니다. 내가 알기론, 오히려 그런 것들에 대해서 과학적인 입증이 되지 않아도 이미 하나님을 믿는 것을 넘어 신뢰하며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에게는 그런 의견이 분분한(?) 사안들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데에 있어 영향을 주지 못한다. 물론 이런 부분에 있어서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이 쉽게 비아냥거리거나 비판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생겨난다. 근거도 없이 믿는 건 맹신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믿음과 신뢰에 대한 개념의 차이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사실, 믿음을 시작하게 되는 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행위인데, 불신자들이 말하는 부분들에 대해서 불신자들의 속을 시원하게 만들어줄 답은 없다. 아무도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믿음이 시작되는 건 개인마다 다르다. 하나님의 시간표가 개인마다 다르고, 개인마다 제각기 다른 감정과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영접의 시기를 표현할 순 없다. 그러나 한가지 동일한 사실은 영접할 당시 평소완 달리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게 되고 더 이상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되지 않고 하나님이 주인이 된 삶을 새롭게 살고 싶은 강한 이끌림을 느낀다는 것이다. 바로 회개의 순간이다.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아직 신학적인 개념을 알진 못하지만) 깨닫게 되는 순간인 것이다. 회개라는 부분은 상당히 주관적이다. 각자의 삶을 살아온 모습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고, 각자가 느끼는 죄라는 부분이 굉장히 은밀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면 세계 깊숙한 곳을 처음으로 터치당하는 느낌이랄까. 그러나 뭔가에 홀려서 정신이 몽롱한 상태가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도 뚜렷하고 선명한 상태로 예수님을 영접하겠다는 결단을 하게 된다. (예수님의 인성을 전혀 알지 못하더라도,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만 듣고 그것에 믿음이 생겨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영접은 기적이다. 처음으로 자신의 영의 원래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교류가 다시 시작이 되는 시점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은혜다. 그렇다. 은혜는 기적이다. 그 기적을 받아들이는 것은 겸손이며, 그 겸손의 행위는 곧 믿음이다.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이지 않아 보이기 때문에 마치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로 여겨질 것이고, 마치 영접의 순간이 술에 취하거나 뭔가에 홀린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죄 (SIN)의 가운데에는 I (나)가 존재한다. 내 인생 내 맘대로 사는 것이 당연한 논리인 이유는 바로 우리 인간이 우리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나 중심으로 살아가도록, 즉 죄 가운데 태어나기 때문이다. 겸손은 나와 내 인생의 주인을 원래 주인이었던 하나님으로 다시 모시는 행위이다. 내가 나를 책임지는 주인이라는 것은 세상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논리겠지만, 기독교에서는 그것은 교만이고 죄다. (살인, 강도 등등도 죄이지만, 기독교에서 주로 말하는 죄는 바로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상태를 말한다. 물론 좀더 깊이 들어가면, 그 배후에는 사탄이라는 존재가 있고 결국 인간을 조종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마치 '매트릭스' 안에서 그것이 진짜 삶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것과 흡사하다) 구원은 이러한 죄인의 삶 (내가 중심인 삶)에서 의인된 삶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옮김을 당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기적이다. 이러한 과정 중에도 여전히 어떻게 동정녀 탄생이 가능하며 부활이 가능하냐고 따진다면, 미안하지만 적어도 그 사람에겐 아직 회개의 순간이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거라 할 수 있겠다. 구원이란 성경을 과학적으로 모두 이해해야만 얻을 수 있는 특권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을 직접 자기 힘으로 한번도 읽어보지 못했더라도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인생 하나조차 가누기 힘들며 자신의 내면 세계가 얼마나 더러운지 그 실상을 깨닫게 된 사람이라면, 그리고 바로 그 상태가 하나님을 떠난 상태, 즉 죄인의 상태였기 때문이며 그곳에서 빠져 나오는 유일한 길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간단하게라도 전도자를 통해 듣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는 구원이 임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내가 여전히 인생 가운데에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으면서 자기 머리로 납득이 되어야만 구원이라는 것을 마치 자기가 받아 주겠다는 태도는 회개와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믿음과 신뢰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여기엔 참 아이러니함이 있다. 재미있게도, 주위에서 항상 보면, 그런 태도의 사람들 (육적으로는 똑똑하지만 영적으로는 교만한, 자기가 주인인 사람들)이, 늘 동정녀 탄생, 부활 등의 개념이 비과학적이며 증거 부족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그런 것들과 상관없이 믿음을 가지게 되는 사람들을 향해 맹신이라며 손가락질을 하며 바보 취급을 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를 이루기 때문이다. 전혀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를 못하고 있으면서 구원과 믿음, 신뢰의 개념을 자기 맘대로 판단하고 비판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는 마치 자기가 아는 단어의 뜻이 다른 나라에서 다르게 쓰여지는 걸 전혀 모른 체 그 나라 가서 그 나라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스스로는 창피한 것도 모른 체 그 사람들을 무식하다고 하거나 말이 안 통한다고 하며 아주 당당하게 뒤돌아 서겠지만 말이다. 구원은 회개의 과정을 반드시 거칠 때에만 가능하다. 회개 없이 머리로 성경을 이해해서 믿음을 가지겠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틀린 것이다. 기독교는 학문이 아니다. 성경 퀴즈대회 1등을 한다거나 성경을 모두 암기한다거나 신학박사학위로 구원이 임하지 않는다.

회개를 거쳐 내가 주인 된 삶에서 예수님이 주인 된 삶을 살기 시작했다면, 바로 믿음이 시작된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러나, 이 시기는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가 이제 막 시작되는 시점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음성 (성령의 인도)에 하나씩 반응하며 자신의 이익/손해에 무관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본 적이 전무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어떻게 일을 하시는지 알지 못한다. 어찌 보면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구원받을 당시는, 예수님만 영접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테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모두 걸어도 될 만큼의 신뢰가 가서 영접하기로 결단했다기 보다는, 자신의 타락한 모습과 한계에서부터 그 원인이 '죄'에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그것에서 해방 받는 유일한 방법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거라는 사실이 믿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성품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한 체 우린 구원을 받는 셈이다. (그러니 구원은 정말 감사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 그러니 구원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하면 정말 큰 착각일 수 있다. (어찌 함께 살면서 교제해 보지도 못했으면서 상대방을 제대로 알 수 있겠는가!) 여전히 이론적인 지식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는 게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목적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데 그치지 않고, 죽기 전에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나라를 누리며 사는 삶이 원래 인간이 살아야만 했을 바람직한 삶이라는 걸 뭇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과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데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나라들을 모두 구원하시길 간절히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스라엘로 시작했지만, 결국 이스라엘을 통하여 만민에게까지 그 복음이 전파되어 세계복음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인 것이다. 이를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소원인 세계복음화는 구원받은 이후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의 순종에 달려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또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가 형성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순종에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순종은 신뢰를 증폭시키고, 증폭된 신뢰 관계는 순종을 더욱 기쁜 맘으로 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성령 인도는 이러한 방향으로 우리들을 지속적으로 이끌고 있으며, 성령 충만은 이러한 방향에 자신의 자유의지를 실제로 맞추어 순종하는 자에게 임한다. (물론 성령 충만은 어떤 소원을 성취하거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 아니다. 성령 인도에 자신의 자유의지를 맞추는 그 자체가 성령이 충만할 때이며, 그렇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 충만은 순종이라는 눈에 보이는 열매로 표현된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은 깊은 신앙의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건 부단한 연습이 필요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건 구원받았다고 해서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며, 끊임없는 성령의 인도에 반응하는 순종이란 행위를 거듭함으로써 일생을 두고 조금씩 가능하게 된다. 그 과정이 인간의 입장에서는 환난/고난/실패라는 이름으로 느껴질 때도 있고, 기쁨/성취/성공이라는 이름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이 모든 과정이 한 가지, 즉 '하나님을 신뢰하기'라는 이름으로 시작/진행/마무리가 되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 모두가 '하나님과 함께', 즉 임마누엘의 삶인 것이다. 그리고 이 삶은 하나님을 알아가고 닮아가는 여정이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제대로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들을 그래서 우린 공부하고 배우고 따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예수님이 실제로 등장하시거나 등장하시고 난 이후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신약성경만이 아니라 구약성경을 공부하고 이해해야만 한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의 약속의 성취이며 율법의 완성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일상에서 하나님 음성을 들으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것을 내 뜻과 분별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어찌 보면 신앙 생활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연습하는 생활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신앙 생활이란 것 자체의 의미가 믿고 (신), 바라보며 따라가는 (앙) 것인데, 이는 '칭의'의 과정을 지나 '성화'의 과정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칭의'가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을 획득한 사건이라고 한다면, '성화'는 그 시민권의 권리와 의무를 이해하고 100% 활용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뢰는 칭의 이후에 성령의 인도를 감지하고 분별하고 따른다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하나님나라 백성의 성화과정의 근간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신뢰 없인 순종할 수 없고 순종 없인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도 없으며 성화과정은 진행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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