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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시간
적어도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돈을 벌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야 논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나는 돈과 시간 중 하나를 택해야 할 때마다 돈이 아닌 시간을 택한다. 그게 맞다고 믿으며, 그렇게 할수록 이 믿음은 더 강해져서 앞으로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당위성마저 생겨버렸다. 이제 이 선택은 내게 있어 더 이상 고민거리가 아닌 것이다.
책을 읽다가 ‘보관 가능성’이라는 표현에 멈춰 섰다. 돈은 저축한다는 명목 하에 보관할 수 있지만, 시간은 보관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 돈은 보관이 가능하기 때문에 축적하여 미래에 사용할 수 있지만, 시간은 보관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반드시 지금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사용할 땐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우리에게 시간을 사용하는 기회는 단 한 번만 주어질 뿐이고, 나중으로 미룰 수 없기에 지금, 여기에서 사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시간의 현재성 (어쩌면 휘발성일지도) 때문이라도 시간은 고유성이라는 가치를 띠고, 사용에 있어서도 더 지혜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지혜는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표현할 수 있을 그 무엇이다. 이런 면에서 돈의 축적은 상대적으로 쉽다고 볼 수도 있다. 당장이 아니라 나중에 사용해도 된다는 생각은 지금, 여기에서 지혜롭지 않아도 되는, 다시 말하자면 게을러도 되는 특권을 부여한다. 이런 생각은 치열하게 살아낼 필요 없이 현재를 미래를 위한 땔감 정도로 여기게 만든다. 현재 몸이 망가지더라도, 행복을 느끼지 못해도, 돈만 축적할 수 있다면 나중은 다 잘 될 거라는 신념에 가득 찬 채로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게으름을 지혜의 반대말이라고 생각한다. 게으른 자가 축적한 것이 돈이라면, 이 게으른 자가 돈을 축적하기 위해 사용한 것은 시간이다. 오로지 돈을 위해 시간을 사용한 셈이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부지런한 자, 즉 지혜로운 자는 돈을 써서라도 가치 있는 시간을 사용하려고 부단히 애쓴다. 시간은 보관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사용해야만 하는데, 어느 곳에 사용할지가 관건인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감당할 만한 돈이라면 시간의 가치를 위해 돈을 포기한다. 시간을 위해 돈을 사용한 셈이다.
게으른 사람은 돈을 위해 시간을 사용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시간을 위해 돈을 사용한다,라는 게 내 지론이다. 운이 좋아 일이 잘 풀린다면, 게으른 사람은 돈을 축적할 수 있을 테지만, 허투루 날려버린 시간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만 하는 날을, 도적같이 임하게 될 그날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비록 축적한 돈은 없을지라도 가치 있게 사용한 시간들 때문에 생겨난, 돈이 아닌 여러 부요함, 이를테면 가족이나 친구 등 소중한 사람들, 부단히 애써온 여러 봉사와 헌신들, 보상이 거의 없던 읽고 쓰고 운동하며 얻은 자기 객관화와 몸과 마음의 건강함 등으로 더욱 깊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돈은 숫자로 표현되고 가시적이라는 특징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통제 하에 두는 가장 믿음직한 아군 혹은 무기로 여긴다. 대신, 바로 윗단락에 쓴 돈이 아닌 부요함들은 비가시적이고 잡히지 않는 가치들이라서 통제할 수 없을뿐더러 내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나는 묻고 싶다. 과연 어느 것이 우리의 삶을 깊고 풍성하게 만드는지.
하루에도 돈이냐 시간이냐를 택하는 여러 기로에 설 때마다 관성에 의해 해 오던 대로 살지 말고 잠시 멈춰 서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가면서도 아무 생각 없이 남들이 하는 대로 살아가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면 더욱더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돈만 모으는 게으름에서 벗어나 시간을 가치 있게 사용하는 지혜로움을 습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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