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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를 넘어 영원으로

장강명 저, ‘벡사시옹의 밤‘을 읽고
- 수북강녕 단편집, '하늘이 참 아름답다고 말할 것' 중 첫 번째 소설

순천 가는 기차 안에서 단숨에 읽었다. 빠르게 지나치는 풍경 옆에서 소설 속으로 미끄러지듯 몰입되는 기분은 느껴본 자만이 아는 묘하고도 소소한 기쁨일 것이다.  

직업 정신이 발휘됐는지 마지막 페이지를 뒤로하자마자 스마트폰을 꺼내어 에릭 사티와 벡사시옹의 관련성을 검색했다. 놀랍게도 사실이었다. 벡사시옹은 에릭 사티가 19세기말에 작곡한 건반 연주곡으로써 한 번 연주할 때 걸리는 시간은 약 1분 정도이지만 840번 반복해야 할 것 같은 비명시적인 조건이 붙어있어 쉬지 않고 연주하면 최소 약 14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실제로 후대에 첫 연주자가 그렇게 연주해 버려 840번 연속 연주가 이 곡의 정석 주법으로 자리 잡은 범상치 않은 곡이다. 벡사시옹은 Vexations를 프랑스어로 음역 한 것으로써 짜증, 괴롭힘, 성가심, 번민 등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내겐 같은 곡을 쉬지 않고 연달아 840번 반복 연주하는 행위는 연주자에게나 청중에게나 벡사시옹이 되기에, 아니 그것을 넘어서기에 충분해 보였다. 

벡사시옹은 아니었지만 에릭 사티의 피아노곡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들을 때마다 환상적이랄까, 몽환적이랄까 하는 기분을 느꼈다. 문득 벡사시옹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진다. 대전으로 돌아가면 찾아 들어볼 생각이다. 그런데 걱정이 앞선다. 840번 반복해서 들어야 완청 하는 것일 텐데, 다 듣기 전에 나는 아마도 영혼이 분리되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이런 걸 쉬지 않고 연주한다니, 도무지 나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반복 자체도 힘들겠지만, 그것보다는 그 행위로부터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를 것 같고, 시지프 신화도 아니고 그 반복의 굴레 속에 갇혀 아마 미쳐버리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소설 속 수현이라는 여성이 바로 이 곡을 연주한다. 그것도 벡사시옹을 6번 더 연주하라는 지침이 달린 벡사시옹 2번을 말이다 (검색해 보니, 벡사시옹 2번은 실재하지 않고 장강명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인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소설 속에서 수현은 벡사시옹을 840번이 아니라 846번 연속으로 연주하는 과업을 달성하는 것이다. 840번 연속 연주한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 몇 명 있었지만, 846번 연주한 사람은 수현이 세계 최초가 될 것이었다. 수현은 소아백혈병에 걸렸다가 치료를 받았고, 낫는가 싶었는데 다시 불치병인 교모세포종에 걸려있는 상태다.   

벡사시옹 연주가 소설 속의 감각적 배경이라면 공간적 배경은 창덕궁 서쪽 벽에 위치한 '수북강녕'이라는 동네책방이다. 에릭 사티의 벡사시옹 2번을 세계 최초로 연주하는 장소가 연주홀이 아닌 동네책방이라는 것. 나는 이 점에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왜 하필 서점인가? 왜 하필 벡사시옹인가? 왜 하필 수현인가? 왜 수현은 벡사시옹을 연주하는가? 하는 질문들을 빠르게 흘러가는 기차 안에서 반복했다. 마치 벡사시옹을 연주하는 것처럼, 비록 840번까진 아니더라도, 나는 책을 덮고 눈을 감고 이 질문들을 반복했다. 

이 작품이 실린 책이 앤솔로지라는 점과 책 앞부분에 적힌 편집자의 말에서 힌트를 얻었다. 눈이 떠졌다. 그 이후 생각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편집자는 이 작품에게 수.북.강.녕. 중에서 '수'를 부여했다. 목숨을 뜻하는 한자어, 장수를 기원하는 소망이 담긴 단어, 수壽. 내 생각은 곧장 수현의 남은 생으로 이어졌다. 2026년 현재, 여전히 교모세포종은 진단 후 평균 1년 반의 생존 기간만을 허락하는 불치병으로 남아 있다. 소아백혈병도 치명타였을 텐데, 그리고 그 치명타를 극복했나 싶었는데, 불치병인 교모세포종에 연이어 걸려 버린 한 인생. 비극이라면 비극일 것이다. 그것도 참 보기 드문 비극. 그렇다면 이 비극의 주인공이 벡사시옹 1번도 아니고 2번을 연주한다는 건 인간에게 부여된 한계를 처음으로 초월하는 몸부림으로 읽을 수 있다. 그 어떤 인간도 넘어본 적 없는 미지의 한계선을 넘어서는 행위로 읽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선은 생과 사를 가늠하는 선일 것이다. 치명타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맞은 이에게는 벡사시옹 1번이 아닌 2번을 완주해야 넘을 수 있는 그런 선. 그리고 어떤 화려한 테크닉이 필요하지 않은 단순하고 짧은 곡을 846번 쉬지 않고 반복 연주한다는 건 더 이상 기교의 문제가 아닌 의지의 문제로 봐야 하기에, 수현의 벡사시옹 2번 완주는 죽음에 패배하지 않고 침몰하지도 않은 채 삶에의 의지가 마침내 실현되는 결과로 해석할 수 있고, 개인적으론 이것이 유일한 독법이어야 한다고 믿고 싶다.  

이 작품 속 수현은 장강명 작가의 아내 김새섬 그믐 대표의 분신일 것이다. 수현의 소아백혈병이 새섬의 교모세포종 1차 확진으로 대체되었을 뿐 김새섬 대표 역시 수현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치명타 (교모세포종 수술 후 재발)를 겪었다. 지금은 2차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회복 중이다. 수현이 넘어선 그 선을 김새섬 대표도 무난하게 넘어서길 간절히 기원한다.  

이 소설의 재미있는 점은 화자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수현이 키우다 죽은 고양이의 영혼 (여기서 고양이도 영혼이 있나요?라는 질문은 하지 말자)이라는 것, 그리고 수현의 연주를 14시간 동안 감상하는 청중이 셋인데, 모두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해인, 인어, 우샨카를 쓴 신사 유령; 장강명 작가의 상상력이란!). 유일한 사람은 수현과 수현의 14시간 연주를 가능하도록 물심양면으로 돕는 수북강녕 대표뿐이다.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수현, 생사를 가늠하기 어려운 최면 상태로 빠져들게 만드는 몽환적인 벡사시옹의 연주, 그리고 연주가 해가 질 무렵부터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의 경계의 시간에 행해진다는 것, 이 모두가 살아있음과 죽어있음의 경계를 묘연하게 하는 장치로써 작품의 공간적 배경인 수북강녕 서점을 환상적인 곳으로 만드는데, 사람이 아닌 특별한 영적인 존재들도 충분히, 그리고 편안하게, 오갈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수북강녕 서점이라는 점도 저자가 이 작품에 숨겨둔 의도 중 하나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수북강녕은 보통 서점이 아님^^). 또한 김새섬 대표와 수북강녕 대표의 교집합이 책이므로 이 장소는 필연적으로 책방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촉은 아마도 옳을 것이다. 책이여 영원하라! 동네책방이여 영원하라! 수북강녕이여 영원하라!  

 

* 장강명 읽기

1. 책 한번 써봅시다: https://rtmodel.tistory.com/1256 

2. 먼저 온 미래: https://rtmodel.tistory.com/2023

3. 재수사: https://rtmodel.tistory.com/2220

4. 서성이다: https://rtmodel.tistory.com/2232

5. 벡사시옹의 밤: https://rtmodel.tistory.com/2259


#빚은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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