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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사가 아닌 난파선의 선장들에게
김새섬, 김진경 공저, ‘난파선의 선장들‘을 읽고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면서도 인간을 항해사가 아닌 '난파선의 선장들'이라 부르는 이 범상치 않은 책은 2025년 4월부터 악성 뇌종양(교모세포종)으로 투병 중인 지식 공동체 ‘그믐’ 김새섬 대표의 인터뷰집이다. ‘당장의 삶, 다가올 죽음, 그 사이를 채운 책에 관한 216일간의 대화’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인터뷰는 스위스에 거주하는 김진경 작가가 진행했다.
인생을 단순히 항해라고만 여길 때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그림은 단 하나였다. 그 그림 속의 나는 망망대해를 항해 중이다. 파도가 넘실대지만 충분히 헤쳐나갈 만해 보인다. 옆에는 돌고래 무리도 보이고, 햇살은 바다에 반사되어 눈을 찌른다. 나는 흰 반바지, 푸른 셔츠, 선글라스 차림에 미소를 띤 채 멋쩍게 키를 잡고 앞만 보고 있다. 장애물은 없다. 전진만 하면 된다. 인생은 모험이다.
그러나 이런 스냅샷 하나만으로 인생을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게 휴양지에 온 것 같은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라면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 어처구니없는 일이 바로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 해 왔던 짓이다. 나의 인생은 가끔 폭풍우를 만날지언정 결국에는 순항하게 되어있었고, 또 그래야만 했다. 아무도 허락해 준 적 없고,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길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인생은 스릴 넘치는 모험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미리 답을 정해놓고 그 답에 끼워 맞춘 형편없는 정신승리의 그림 한 장을 내 인생이라고 여겼던 듯하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느낀 건 수치스러움이었다. 나는 내가 키를 잡고 있는 배가 난파당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있어서도 안 되었다. 모험은 힘들지언정 계속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아주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건 너무나 주관적이고 근시안적인 생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허무하리 만큼, 어이없을 만큼 나는 어리석었다.
모든 항해는 끝이 있기 마련이다. 이 말은 모든 인생은 끝이 난다는 말과 같고, 또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나라는 인간도 끝이 있고, 순항을 누리던 내 인생도 머지않아 난파를 당할 거라는 말이다. 이것은 예언도 저주도 아닌 사실일 뿐이다. 모든 항해의 끝에서 모든 인간은 난파선의 선장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제목은 완전히 옳다.
이 책은 우리가 탄 모든 배가 난파당하고 말 거라는 명징한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종종 삶을 추상적으로, 때론 낭만적으로까지, 보이게 한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는 사람과 그 언젠가가 바로 오늘일 수 있다고 아는 사람은 주어진 현재를 다르게 대할 수밖에 없다. 예상보다 이른 시기에 자신의 죽음이 성큼 다가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의 삶에 대한 태도 역시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인생을 항해하는 배는 단 두 가지만 존재한다. 난파당한 배와 아직 난파당하기 전의 배. 난파 여부가 아닌 난파 시기의 차이일 뿐이다. 자기 인생의 난파 시기를 아는 것. 그 시기가 뜻밖일지라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일 것이다. 메멘토 모리!
이 책에서 눈여겨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부분은 김새섬 대표의 삶에 대한 태도이다. 의연함이라는 표현조차 무색할 정도의 모습을 나는 이미 ‘암과 책의 오디세이’를 들으면서 누누이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건 어쩌다 감정이 북받쳐 일기에 써 내려간 수줍은 고백이 아니었다. 본인 얘기를 마치 다른 사람의 얘기인 것처럼 말하는 그의 태도에서 나는 비슷한 상황에 처한 많은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자기 연민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마흔여섯 해 어느 날 불쑥 찾아온 난치성 뇌종양 앞에서 ”Why me?"가 아닌 “Why not me?"를 묻는 사람이다.
좋은 삶 없는 좋은 죽음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웰다잉은 웰에이징과도, 웰리빙, 웰비잉과도 직결된다. 이 책에서는 좋은 삶과 좋은 죽음을 위한 조건들도 하나씩 짚는다. 난파선의 선장들이 삶에서 길어 올린 깊은 말이기에 우린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다. 난파되기 전의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 책을 모든 난파선의 선장들에게 추천한다.
김새섬 대표는 현재 교모세포종 재발 후 2차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회복 중이다. 이 책 출간을 계기로 그믐 활동도 다시 시작했다. 종종 들려주는 소소한 일상 이야기들이 그 어느 때보다 기쁘게 다가온다. 부디 모든 확률을 뚫고 완치까지 난파되지 않는 항해가 되길 두 손 모아 기도한다.
#어크로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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