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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채로운 여백들을 텍스트로 그려내는 작가, 클레어 키건
클레어 키건 저, ‘푸른 들판을 걷다’를 읽고
- 작별 선물
성인이 된 한 여성이 미국 뉴욕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영국 시골집에서 가족과 작별하는 순간을 롱테이크로 담은 초단편소설. 생리를 하기 전 얼마 동안 그녀의 이버지는 그녀에게 당연하다는 듯 성추행을 일삼았다. 어머니는 남편을 혐오했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오빠는 아버지를 뒤이어 아버지와 함께 농사일을 한다. 그녀는 오빠나 언니처럼 기숙학교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집안일을 거들어야 했다. 모든 게 다 아버지의 지배 하에 있었다. 그곳에 머문다는 건 곧 아버지로부터 영영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뉴욕행을 결정한 건 이미 정해진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공항으로 가는 날 아침, 그러나 그녀는 상념에 잠긴다. 해방감을 만끽할 것 같았던 그날 아침 그녀의 발걸음은 유난히 느리고 무겁다. 태어나서 자랐던 그곳, 여전히 폭군이 지배하는 그곳, 그곳에 계속 어머니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 인사를 건네지만, 그는 별다른 말도 없고 배웅도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아버지의 방을 나와 욕실로 가서 손과 얼굴을 씻고 마음을 가라앉힌다.
오빠가 공항까지 차로 데려다준다. 자기 때문에 오빠도 진작 집을 떠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말을 듣는다. 고마운 말이다. 그녀는 처음 가보는 공항에 도착해 오빠와 어색한 작별을 하고 수속을 마친 뒤 북받치는 가슴을 부여잡고 화장실을 찾는다. 들어가 문을 닫기 전까지 울지 않는 데에 가까스로 성공한다.
말하지 말고 보여주기 식의 교본을 보는 듯한 작품이다. 해석과 설명은 순간의 장면들을 텍스트로 옮길 때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키건의 짧고 건조한 문장들은 말 없는 것들이 말하게 하는 신비한 힘을 가지는 것 같다. 이 신비한 힘에 한번 매료되면 독자는 어느새 키건의 문장 속으로 들어가 오감이 열린 채 그곳에 서 있게 된다. 공감각적인 독서를 하고 싶을 땐 키건의 문장을 읽자.
- 푸른 들판을 걷다
이 단편집의 대표작. 한 신랑 신부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어느 사제의 일과를 그린 그림 같은 이야기. 후반부에 가서야 결혼식의 신부가 사제의 옛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제직과 연인 중 하나를 택해야 했을 때 사제는 사제직을 택했고 연인과는 헤어지게 되었다. 바로 그 연인이 오늘 같은 동네에서 다른 남자와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사제는 끝까지 참석하고 과거를 회상하며 상념에 잠긴다. 푸른 들판을 걸으며 당도한 중국인의 집에서 마사지를 받고 가벼워진 몸을 느낀다. 주인공인 사제의 번민이 느껴졌고, 그의 신앙과 사랑,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그저 덤덤하게 느껴졌다. 아직 젊은데, 마치 가장 좋은 것은 이미 지나가버린 것 같은 묘한 아쉬움도 느껴졌다. 그가 걷는 푸른 들판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비록 마사지로 인해 가벼워진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제에게 깃든 휑한 마음 탓인지 푸른 들판도 휑하게 느껴진 소설. 키건 특유의 여백이 휑함으로 느껴진 소설.
- 검은 말
사랑했던 여자를 객기로 떠나보내고 무기력함에 치여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어리석은 한 남자 브래디의 이야기. 브래디는 여전히 그녀가 돌아오길 기다린다. 그럴 리 없을 줄 알면서도 하염없이. 다음날 무기력함에 패배를 당할까 봐 입고 있던 옷도 제대로 벗지 못하고, 신고 있던 신발도 벗지 못한 채 매일 잠이 든다. 남자다움이란 무엇인가 하고 문득 생각하게 된다. 한 남자의 어리석음과 후회와 자책이 문장 사이사이에 연기처럼 스며든 소설. 긴 한숨이 나오는 작품.
- 삼림 관리인의 딸
성실한 일꾼이나 옹졸한 에고이스트였던 남자 디건의 몰락 과정을 그린 소설. 아내를 맞이한 것도 사랑에 빠져서가 아니라 아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던 남자. 그의 작은 머릿속 마스터플랜은 오직 자기만을 위한 것이었기에 그것들을 하나둘씩 이루기 위한 과정 가운데 가족은 없었다. 혈육인 두 아들, 혈육인 줄 알았던 막내딸 (삼림 관리인의 딸, 유난히 똑똑했던 자녀, 나중에 알고 보니 디건의 피가 아닌 어느 날 장미를 팔러 온 외판원의 피였음), 그리고 아내 모두 디건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디건으로부터 사랑을 받지도 못했다. 그러면서도 남의 시선에 민감했던 남자 디건. 어느 날 지능이 떨어진 둘째 아들의 실수로 인해 디건의 모든 것이었던 집이 화재에 휩싸인다. "난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몰랐어." 디건은 처음으로 인정하는 말을 한다. 아마도 디건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할 것이다. 삶은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두 번째 인생에는 가족이 있을까?
이 소설은 클레어 키건의 매력이 도드라지지 않은 느낌이었다. 막내딸의 출생 비밀이 하나의 반전 포인트이긴 하나 키건의 여백을 강조하기에는 모자란 설정 같았다.
- 물가 가까이
어릴 적 할머니 손에 자라 하버드까지 입학한 주인공 청년은 백만장자와 재혼한 어머니와 스물한 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텍사스에 잠시 방문했다. 어머니는 여전히 행복하지 않은 듯하지만 아들이 하버드생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뻐한다. 불편한 식사를 마치고 홀로 해변을 산책하다 바다를 헤엄 치며 괜히 왔다는 후회를 한다. 리조트로 돌아가면 곧바로 비행 편을 변경하여 케임브리지도 돌아갈 계획을 세운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가까스로 해변에 도착한 그는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 항공사에 전화를 건다. 대답하려는데 어머니가 방에 들어와 서 있다. 그는 할머니를 생각한다. 바다를 너무도 사랑하셨던,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할머니를.
백만장자 새아버지, 하버드 입학이라는 설정만 제외하면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정환경이다. 부모의 이혼, 재혼, 그런 부모와의 좋지 않은 관계. 그러나 주인공에게는 할머니라는 고향 같은 존재가 있다. 그나마 다행이다. 마음을 둘 곳이 있다는 건. 그는 아마 물가에 갈 때마다 할머니를 떠올릴 것이다.
- 굴복
아일랜드 소설가 존 맥가헌의 '회고록'에 실린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쓴 소설. 가학적인 성향을 가진 듯한 한 중사의 일상 이야기. 약혼녀로부터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는 편지를 받는 남자. 그러나 계속해서 타자로부터 은밀한 우월감을 느끼며 살아있음을 느끼는 인간. 하지만 너무 짧은 분량에 소개된 정보로는 주인공의 성향을 입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해 아쉬운 소설.
- 퀴큰 나무 숲의 밤
아일랜드 설화의 짙은 향기가 배인 소설. 이 단편집 중 환상적인 느낌이 가장 강한 작품. 결혼 약속까지 했지만 남자는 사제가 되어버렸고, 그의 아이를 낳았으나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을 맞이했다. 세월이 흘러 사제가 죽었고, 여자는 사제가 물려준 집에서 살게 된다. 옆집에는 염소와 함께 사는 독신남이 기거한다. 어느 날 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고 둘은 두 집 사이의 벽을 허물고 같이 살게 된다. 미신을 신봉하는 그녀는 신비한 치유의 힘을 가지고 동네 이웃들의 문제들을 해결해 준다. 그렇게 수년이 지나고, 염소와 같이 사는 남자의 꿈은 현실이 된다. 여자는 아들과 함께 돌연 그를 떠난다. 그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간다.
내게는 키건의 매력이 잘 느껴지지 않았을뿐더러 설화보다는 환상소설로 읽혀 낯설게 다가온 작품이었다. 키건의 작품을 많이 읽진 않았지만, 환상적인 요소가 배제된, 일상의 세미한 부분이 갖는 여백의 미를 최대한 증폭시키는 류의 소설이 키건의 주무대가 아닌가 싶다.
- 총평
키건은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다채로운 여백들을 증폭시켜 텍스트로 그려내는 작가인 것 같다. 환상적인 요소를 사용하는 것보다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그러나 자주 놓치고 마는, 일상의 조각들로부터 진한 여백의 미를 길어 올리는 데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 같다. 한국어로 번역된 다른 작품도 읽어볼 생각이다. 그리고 영어 원문으로도 읽어볼 가치가 있을 것 같다. 키건의 문체는 원어로 더 잘 느낄 수 있을 테고, 그래야 제대로 키건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다산북스
#김영웅의책과일상
* 클레어 키건 읽기
1. 맡겨진 소녀: https://rtmodel.tistory.com/1740
2. 이토록 사소한 것들: https://rtmodel.tistory.com/1741
3. 푸른 들판을 걷다: https://rtmodel.tistory.com/2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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