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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온지 5년이 넘었고 영어가 많이 익숙해졌다. 아직도 못 알아들을 때가 많고 한없이 서툴지만 5년전보단 훨씬 나아졌다. 미국 문화에 익숙해진 만큼이랄까. 언어가 문화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토익, 토플 점수도 좋았고 대학 본고사까지 영어를 봤고 대학교/대학원에서도 영어 수업을 많이 들어봤으니 "한국 영어"라는 문맥에서는 나름 상위권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만큼 첨 미국에 왔을 때의 충격은 너무나도 컸다. 그나마 논문 읽을 때나 관련된 연구에 관한 내용을 발표하거나 토의할 때 사용되는 "고급 영어"는 오히려 할만 했다. 그러나 일상생활 영어는 완전 죽을 써야만 했다. 미국에선 전화로 처리해야 할 일이 한국보다 더 많은 편인데, 특히 전화로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날이면 그 엄청난 스트레스와 더딘 진행과 짜증에 견딜 수가 없었다. 미국 TV도 보고 미드도 보고 뉴스도 보고 라디오도 들었다. 클리블랜드에는 특히 한국인이 적었고 내가 속한 학과에서 한국인은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국어를 쓰는 비중이 훨씬 줄어들었었다. 그러나 다들 언젠가 귀가 트이고 입이 열린다는 그날이 내겐 3년이 다 되어갈 때에도 오지 않았다.
주눅이 들었다. 자신감이 없어졌다. 버벅대며 문제를 그나마 겨우겨우 해결해 나가는 데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한건 주위 사람들에게 박혀가는, 내가 영어를 능통하게 하지 못한다는 선입견이었다. 그런게 느껴질 때면 치욕과 모욕감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달리 대응할 처사가 없어서 더욱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었다. 영어는 내게 언어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었다. 극복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말이다.
아들이 유치원에 들어가기 몇달 전부터다. 자기 전에 아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bedtime story 시간은 우리에겐 일종의 의식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렇다), 그 시간에 읽을 아이들이 읽는 책들을 빌려서 읽어주기 시작했다. 한 페이지에 한 문장이나 두 문장 정도 있고 대부분이 그림으로 가득한 책들부터 시작했다. 아마 도서관에 존재하는 아이들 책들 중 절반 이상을 다 읽었었던 것 같다. 하루에 적게는 3권, 많게는 5권까지 매일 읽어 나갔으니 말이다. 아마 지금까지 아들에게 읽어준 영어책은 2000권이 훨씬 넘을 거다.
시간이 갈수록 페이지당 문장 수는 점점 늘어갔고, 그 사이에 아들은 유치원에 들어갔고, 또 1학년이 되었고, 현재는 2학년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데, 요즘은 제법 두꺼운 책들을 읽어줄 수 있게 됐다. 챕터 북을 넘어 이젠 그림이 거의 없는 책 수준으로 올라섰다 (그래서 요즘엔 같은 시간에도 하루에 한 권도 채 못 읽는다).
아들에게 책 읽어 주는 시간이 처음에는 아들을 위한 목적이었지만, 결국 득을 본 건 둘 다다. 나는 아이들 책을 소리내어 읽어주면서 발음이 교정되어졌고 문장을 읽는 억양을 연습할 수 있었으며 미국 아이들이 사용하는 단어들과 문장들 (한국에선 전혀 배울 수 없었던)을 익힐 수 있었으며 (논문 보면서 사전을 찾진 않지만, 아이들 책 읽으면서 단어를 많이 찾았다는...ㅎㅎ) 미국 사람들이 생각을 진행해 나가는 사고방식과 문화를 그대로 접할 수 있었다. 아들은 독수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리딩과 스피킹, 리스닝 부분에선 ESL 과정이 필요없이 언제나 제 학년 이상의 실력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었다.
물론 나는 여전히 영어보단 한국어가 편하다. 그러나 달라진 건, 두려움이 제거되었다는 것, 주눅이 들지 않는다는 것, 전화할 때도 잘 들린다는 것, 전화하면서도 내 페이스로 대화를 끌고 나갈 수도 있게 된 것, 미국 현지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그들의 "특별 관심" (영어 잘 못하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그들이 나타내는 행동과 자세)을 받지 않고 무슨 말이냐며 다시 말해 달라는 가시 돋힌 정중 요구의 말을 듣지 않게 된 것, 그리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영어를 못한다는 선입견을 못 느끼게 되어 나도 그저 피부색만 다를 뿐이지 one of them이 된 것이다.
매일 밤 자기전 아들과 함께 하는 bedtime story 시간은 우리에겐 축복의 시간이었음이 확실하며 나같이 영어를 상대적으로 못했던 사람들이 미국 현지 영어에 익숙해지기 위한 방법으로 나는 아이들 책을 소리 내어 읽을 것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물론 그것이 자녀와 함께 하는 시간이 되면 일석이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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