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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정체성 숨기기

가난한선비/과학자 2017. 3. 28. 05:24

갑자기 딸처럼 보이는 아이에게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분명 좀 전까지만 해도 한국말이었는데, 가까이 다가오는 내 인기척을 느꼈는지, 아님 갑자기 무슨 변화가 공교롭게도 그때 생겼던지, 그 사람의 말은 순식간에 영어로 바뀌었다.


'그런데 어떡하나. 난 벌써 알아버렸는데. ㅋㅋㅋ 들통났어요. 아줌마. 한국 사람인 거 다 알아요.'


한두 번 경험한 게 아니다. 캘리포니아로 온지 반년밖에 안됐지만, 벌써 오늘이 두 번째다. 물론 미국에 있는 한인들을 일반화할 순 없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내겐 솔직히 충격이었다.


'왜 그랬을까. 도대체 왜 자신이 한국인임을 감추려 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과 추측이 머리 속에서 광속처럼 지나가지만, 난 여전히 정답을 모른다. 그저 여러 번 목격만 하고, 또 그것이 내 착각이 아님을 여러 차례 확인했을 뿐, 답은 아직 모른다.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소수에게서만 발견되는 현상을 분석할 땐 두 가지로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첫 번째, 그 표현형이 다수의 표현형을 대변한다는 가정이다. 그들이 대표라는 뜻이 아니다. 말하자면 이렇다. 한 마디로 threshold 이론이다. 즉, 모든 사람이 비슷한 현상을 나타낼 징후를 다 가지고 있지만, 거기엔 발화점 같은 게 있어서 상대적으로 낮은 발화점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이 쉽게 밖으로 표현을 터트린다는 가설이다. 두 번째는 mutant 이론이다. 다수의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유독 몇몇 소수의 사람들만 마치 돌연변이처럼 이상하게 튀는 행동을 한다는 가설이다.

내가 맞닥뜨린 상황이 전자의 경우라면 시간이 지나면서 n수만 늘린다면 통계학적으로 유의한 결과값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만약 다른 사람들도 같은 현상을 목격하여 데이터를 함께 모은다면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겠지만,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이라 왠만한 수의 결과값이 아니면 결론을 내릴 수 없을 테다), 후자라면 내가 만났던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만한 그 사람들이 모두 내가 기똥찬 우연으로 만나왔다는 얘기가 된다 (뭐 내가 뮤턴트들을 응집시키는 거대 자석도 아니고 말이야 ㅋㅋ).


난 정말 궁금하긴 한데, 안타까운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없다는 거다. 미국 전역에서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할 수도 있겠지만, 돈도 안 되는 이 일을 누가 지원하며 누가 진행하겠는가. 또한 그 뮤턴트들이 유전적인 결함이 있는지 마우스 genotyping 하듯 PCR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상상은 자유다. ㅎㅎ

가정을 하나 해 보자. 그 사람들은 한국인 앞에서만 한국인임을 감춘다는 가정이다. 아마 이건 가정이 아니라 사실이 아닐까 한다. 그들이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이 다가왔을 때 갑자기 한국인임을 숨길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미 영어권 사람들은 멀리서도 피부색으로 당신이 아시안인지 다 안다. 당신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을 뿐더러, 당신이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베트남 사람인지 관심 없다. 당신이 영어를 유창하게 해도 당신은 아시안이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에게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감추고 마치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알 수 없게 만들려는 작정으로 한국말을 하다가 갑자기 영어로 말했다는 말이 되는데, 참 난감하다. 물론 내가 좀 등치도 크고 차카게 생기지 않아서, 순간 비논리적인 발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숨겼을 수도 있다 (맞다. 내 피해의식이다). '그러나 당신이 날 한국인으로 알아봤듯이 나도 당신이 한국인임을 알고 있다. ㅋㅋ'


아니면 내가 뭐 꼼수라도 걸까 봐 일부러 그런 것일까? 음... 이것 또한 말이 될 수 있다. 왜냐면 그 소수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두 아줌마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왜? (아. 이 또한 내 외모 때문? ㅜㅜ)


미국에 오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한결 같이 충고해 준 말이 있다. 미국 가면 한국 사람 조심하라는 말이었다. 한국 사람이 제일 많이 등쳐먹는 사람이 바로 한국 사람이기 때문이랬다. 그땐 난 그 충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왠지, 슬프지만, 이젠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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